시인 황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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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수: 12    업데이트: 17-01-26 11:30

자유게시판

[기고] 그 사람이 그립다 2013-10-24 영남일보
황영숙 | 조회 1,078

사회, 정치 전반에 혼란스러움이 가득

우리 영혼 깊이 만져줄 지도자, 교육인 등 사람이 그리워져

 

어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본, 어느 집 담장에 매달려 있던 호박넝쿨이었다. 그 호박잎과 호박꽃, 어린 꽃봉오리를 보는 순간 어머니의 된장찌개가 본능처럼 떠올랐던 것이다. 불 끄기 직전에 호박꽃 어린 봉오리를 넣고 끓인 어머니의 된장찌개, 별다른 재료를 넣지 않고도 영혼까지 깊이깊이 어루만져 주던 어머니의 된장찌개, 호박잎 쪄서 쌈 싸 먹으면 더 맛있는 된장찌개, 아아, 나는 몹시도 어머니가 그리웠던 것이고, 돌아가고 싶었던 것이고, 결국 외로웠다.”

얼마 전에 읽었던 어느 시인의 절규에 가까운 산문이다. 호박꽃이 수없이 피었다 져도 이제는 다시 돌아가 먹을 수 없는 어머니의 된장찌개가 먹고 싶어 목메기 송아지처럼 배가 고프다고 시인은 울부짖는다. 시인은 이제 어디로 돌아가 허기진 배를 채울 것이며, 지친 영혼을 눕힐 것인가. 한국은 어디에 있으며, 우리는 어디까지 와 있는가. 단일 민족이라, 백의 민족이라고 다정히 손잡고 걷던 옛날이 그립다.

TV를 켜면 어린 배우들은 자매처럼 얼굴이 닮아있고, 중년 배우들은 환자처럼 한결같이 얼굴이 부어 있다. 백의를 입고 오는 아름다운 조선의 사람은 병풍과 촛불 밑으로 잠시 다가오는 돌아가신 그리운 영혼이신가. 잠에서 깨어나면 습관처럼 듣게 되는 고위공직자의 비리 소식에 아침밥은 씁쓸해지고, 황망히 나서는 길거리엔 벌써 가을이 깊어 가고 있다. 국민의 조그만 죄에도 수갑을 채우고 칼을 휘두르던 절대 권력의 총수가 국민 앞에 당당하고 떳떳하지 못하다면 우리는 누굴 믿고 민주국가의 안녕과 질서를 바랄 수 있겠는가?

우리는 언제나 혼란스럽다. 민주사회에서 자유로운 의사 표출이나 정치적 견해와 신념을 밝히는 것도 좋지만, 선거 한 번 치를 때마다 염치도 없고 철학도 없는 정치인들의 모습을 보는 것은 곤혹스럽다. 선거 때마다 캐내고 감추는 그들의 기막힌 숨바꼭질 속에서 그들이 숨겨놓은 머리카락 한 줄도 찾아내기 힘든 서민들은 내 한 표의 중요성을 깊이 생각할 여지도 없이 습관처럼 투표장으로 향한다.

지금 우리 주위에는 쥐와 고양이가 들끓고 있다. 고양이가 잡지 않았던 쥐는 이제 고양이를 무서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한통속이 되어 우리의 구석구석을 갉아먹고 있다. 이제 그들은 비굴하게 숨거나 도망가지 않는다. 그들을 색출해서 엄단해야 하는 정부기관마저 광기 어린 그들의 눈빛에 질려 버린 것인가. 지난 십수년 동안 세력을 키운 그들은 일가를 이루어 차려진 밥상 앞에 당당하게 앉아있다. 건드리면 더욱더 광기를 발하는 눈빛과 날카로운 발톱이 우리 사회를 선동적 폭력 투쟁으로 내몰고 있음을 알면서도 강 건너 등불처럼 보지 않았던가.

세상이 이렇게 혼란스러워서일까. 사람이 무척 그립다. 우리의 영혼까지 깊이깊이 만져줄 그런 사람이 그립다. 어떠한 억압이나 고통에도 굴하지 않고 거침없는 용기와 원칙으로 나라를 이끄는 거대한 덕목을 가진 지도자, 그의 거칠고도 따뜻한 손이 그립다. 난세의 가시밭길을 걷고 걸어 나라의 양심으로 남아 넘치는 자부심으로 민족정기를 이어가는 정치인, 올곧은 정신으로 정직한 백년대계를 꿈꾸는 소신 있는 교육자, 서슬 퍼런 칼날 앞에서도 부러지지 않는 칼로 남아 오직 진실만을 쓰고 진실만을 말하는 국민이 자랑하는 언론인, 나는 그들이 한없이 그립다.

여름 내내 우리를 괴롭히던 더위도 끝나고, 이제 하늘은 무심히 푸르다. 하늘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살고 있는 높고 높은 곳에서 우리를 내려다볼 뿐이다.

 

2013-10-24 영남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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