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황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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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매일춘추] 풀꽃 이야기 2011.11.28 매일신문
황영숙 | 조회 940

[매일춘추] 풀꽃 이야기

한때 누구나 꿈꾸었을 꽃 같은 마음, 꽃 같은 삶, 꽃같이 예쁜 얼굴. 우리는 꽃만큼 아름답기를 늘 기원하며 살아오지 않았을까? 꽃처럼 살고 싶었던 우리들의 한 생애, 그러나 우리는 꽃처럼 살아가지 못하기 때문에 꽃을 가꾸고 더욱 더 꽃을 좋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꽃을 한아름 안고 가는 사람을 만나거나 꽃집 앞을 지날 때면 습관처럼 걸음을 멈추거나 차의 속도를 늦춘다. 기쁠 때나 슬플 때 고통스러울 때도 우리는 꽃을 보며 스스로를 가꾸고 위로하며 살아간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이른 봄 흙을 뚫고 올라오는 야생의 여린 풀들을 볼 때마다 생명의 경이로움과 환희에 가슴이 설렌다. 아직도 매서운 바람이 마른 나뭇잎을 휩쓸고 가는 깊은 산속에서 일행을 놓치고 허둥대던 내 발밑에 노랗게 돋아나는 복수초를 만난 날 그때부터 나와 야생화의 인연은 시작되었다. 길을 잃었다는 두려움도 잊은 채 잔설을 껴안고 피어나던 꽃 앞에서 나는 이승이 아닌 저승의 어디쯤에 오지 않았을까 하는 신비감에 사로잡혔다. 그땐 비록 이름도 몰랐던 꽃이었지만 바람 부는 산속에 의연하게 핀 그 꽃은 나의 두려움과 외로움을 향해 “너는 할 수 있어, 너는 갈 수 있다”고 나직이 말하고 있었다.

우리의 산과 들에 피는 야생화는 우리 어머니의 꽃이기도 하다. 인고의 세월을 견디며 모진 생명을 이어가던 그 시절 가난한 마음에 피어나던 낯익은 풀꽃들을 보면서 한과 설움을 달랬을 어머니를 닮은 꽃, 우리는 이 꽃을 지키고 가꾸어야 한다.

요즘은 야생화 화원에서 여러 종류의 우리 꽃을 개량하고 키워서 팔고 있지만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의 무관심과 욕심 때문에 상품화된 풀꽃들은 수없이 죽어가고 있다. 바람과 햇빛, 적당한 습도와 추위를 견뎌야만 피어나는 꽃, 메마른 콘크리트 벽 속에 갇혀 있는 풀꽃들을 보면 나는 언제나 죄인이 되어 부끄럽고 미안하다.

결코 아무렇게나 아무 곳에서나 피지 않는 꽃, 우리의 사랑과 관심 속에서만 꽃대를 올리는 가녀린 목숨 앞에서 나는 언제나 경건해진다.

시를 쓰는 나의 창가에서 나직이 들려주던 풀꽃의 이야기를 적은 나의 졸시 ‘풀꽃’을 다시 한 번 읽어본다.

‘길가에 아무렇게나 피는 꽃이라고/ 말하지 마세요/ 숲속에 흐드러지게 피는/ 흔하디 흔한 꽃이라고/ 말하지 마세요/ 아무도 깊은 마음 드러내지 않는/ 얽히고설킨 가시덤불 속에서도/ 숨죽이며 조용히 피는 꽃입니다/ 키 큰 나무들이 서성대고 술렁대는 산비탈에서도/ 한 점 별같이/ 영롱한 목숨으로 피어납니다/ 당신이 거기 있어서/ 사랑하는 당신이 거기 있어서/ 당신이 걸어가는 세상의 길가에/  키 낮은 사랑으로 피어납니다.’                                 

황영숙(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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