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황영숙
오늘 44     전체 89,931
글 수: 12    업데이트: 17-01-26 11:30

자유게시판

[나의 살던 고향은] 33)황영숙 시인의 경산 와촌
아트코리아 | 조회 1,222

고향이라는 말만 들어도 설레던 시절이 있었다. 이 글을 쓰기로 한 날부터 나는 고향이라는 따뜻한 마음의 풍경들을 떠올리며 몇 날을 고향 생각에 잠겨 있다가 마감이 임박한 오늘에야 가슴 속에 글썽이고 있는 고향이야기를 쓴다. 지금은 고향 가는 모든 길들이 자동차로 달릴 수 있을 만큼 좋은 세상이 되었지만 그 당시만 해도 내가 살고 있는 고향은 차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도 산길로 삼십 리를 걸어 들어가야 하는 깊은 산골이었다.

경북 경산시 와촌면 양곡리, 소월리, 방그리, 박사리 등이 내 어린 시절을 보낸 동네 이름들이다. 와촌면 근처엔 도광의 선생님의 고향인 동강리와 구활 선생님의 고향인 하양읍이 이웃하고 있었지만 두 선생님이 자란 곳은 내가 자란 동네에 비하면 큰 도시였다. 내가 중학교에 다닐 무렵엔 동강리 마을 앞으로 버스가 다니기 시작했다.

동강리에 내려 다시 삼십 리 길을 걸어 들어오면 이미 해는 저물어 캄캄하고 마을에 들어서면 멀리서 늑대의 울음소리가 메아리처럼 들리곤 했다. 가끔 문단의 공식모임에서 아직도 물푸레나무처럼 푸르고 키가 크신 두 선배 선생님을 만날 때마다 고향 친척오빠를 만난 것처럼 나는 마음이 든든해진다.

내고향은 경산시 와촌면 소월리. 그때 봄날 진달래꽃 흐드러지던 소월지를 다시 찾았다. 세월이 이렇게도 얄미울까. 교편생활을 하시며 애지중지 키운 자식들을 도회지에 보내 놓고 쉰여섯에 봄날 진달래꽃 지듯 혼자 가신 아버지. 아버지/당신이 나를 도시로 보내지 않았다면/당신이 지켜오던 고향 냇가에 앉아/당신의 고무신을 하얗게 씻으며/ 살고 싶었습니다… .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나의 고향이야기 속엔 언제나 외할머니가 계신다. 우리 집에서 십리쯤 떨어진 곳에 외갓집이 있었는데 외갓집에서는 담배라고 써 붙인 작은 구멍가게를 했다. 내가 좋아했던 사탕이나 생활용품, 그리고 그 당시 담뱃대에 넣어 피우던 풍년초와 파랑새라는 담배를 팔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외갓집을 거쳐 학교를 다니던 때 외할머니는 내가 지나는 길목에서 기다리시다가 비스켓이나 사탕을 아무도 몰래 책가방에 넣어 주시고, 꽁꽁 언 나의 손을 할머니의 가슴 속에 넣어 녹여 주시던 기억은 언제나 나를 울먹이게 한다. 다 커서 홍역을 시작한 내가 기운을 잃고 여위어 갈 때 나를 위해 약병아리를 구해와서 고아주시고, 마을 사람들 모두가 죽는다고 했던 나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부처님에게 매달리며 나를 살리셨다는 외할머니… 아직도 외갓집은 그곳에 있는데 나를 보고 달려오시던 외할머니는 보이지 않는다.

고향이라는 말만 들어도 설레던 시절이 있었다. 이 글을 쓰기로 한 날부터 나는 고향이라는 따뜻한 마음의 풍경들을 떠올리며 몇 날을 고향 생각에 잠겨 있다가 마감이 임박한 오늘에야 가슴 속에 글썽이고 있는 고향이야기를 쓴다. 지금은 고향 가는 모든 길들이 자동차로 달릴 수 있을 만큼 좋은 세상이 되었지만 그 당시만 해도 내가 살고 있는 고향은 차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도 산길로 삼십 리를 걸어 들어가야 하는 깊은 산골이었다.

경북 경산시 와촌면 양곡리, 소월리, 방그리, 박사리 등이 내 어린 시절을 보낸 동네 이름들이다. 와촌면 근처엔 도광의 선생님의 고향인 동강리와 구활 선생님의 고향인 하양읍이 이웃하고 있었지만 두 선생님이 자란 곳은 내가 자란 동네에 비하면 큰 도시였다. 내가 중학교에 다닐 무렵엔 동강리 마을 앞으로 버스가 다니기 시작했다.

동강리에 내려 다시 삼십 리 길을 걸어 들어오면 이미 해는 저물어 캄캄하고 마을에 들어서면 멀리서 늑대의 울음소리가 메아리처럼 들리곤 했다. 가끔 문단의 공식모임에서 아직도 물푸레나무처럼 푸르고 키가 크신 두 선배 선생님을 만날 때마다 고향 친척오빠를 만난 것처럼 나는 마음이 든든해진다.

나의 고향이야기 속엔 언제나 외할머니가 계신다. 우리 집에서 십리쯤 떨어진 곳에 외갓집이 있었는데 외갓집에서는 담배라고 써 붙인 작은 구멍가게를 했다. 내가 좋아했던 사탕이나 생활용품, 그리고 그 당시 담뱃대에 넣어 피우던 풍년초와 파랑새라는 담배를 팔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외갓집을 거쳐 학교를 다니던 때 외할머니는 내가 지나는 길목에서 기다리시다가 비스켓이나 사탕을 아무도 몰래 책가방에 넣어 주시고, 꽁꽁 언 나의 손을 할머니의 가슴 속에 넣어 녹여 주시던 기억은 언제나 나를 울먹이게 한다. 다 커서 홍역을 시작한 내가 기운을 잃고 여위어 갈 때 나를 위해 약병아리를 구해와서 고아주시고, 마을 사람들 모두가 죽는다고 했던 나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부처님에게 매달리며 나를 살리셨다는 외할머니… 아직도 외갓집은 그곳에 있는데 나를 보고 달려오시던 외할머니는 보이지 않는다.

나의 아버지는 그 당시 사범학교를 졸업하시고 학교에 재직하셨는데 신혼살림을 학교 사택에 차리셨다. 사택이래야 초라하기 짝이 없는 방 한 칸이었지만 어머니는 지금도 그때가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다고 회상하신다. 내가 자라고 동생들이 태어나면서 아버지는 방그리에 우리들이 살 새집을 지으시고 양곡리에 논을 샀다. 양곡리는 옛날 씨족 사회의 표본인 황씨들의 집성촌이었다.

마을 전체가 친척들이었고 마을에 제사가 있는 날이면 모두 한집에 모여 남자들은 마당에 멍석을 깔고 제사를 지내고 여자들은 편을 갈라 음식을 만들고 나누는 일을 서로 배우며 가르치며 살았던 따뜻하고 평화로운 마을이었다.

차례상을 차려놓고 엄숙하게 제사를 받들어 모시는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 자손들을 바라보며 이것이 바로 가문이며, 가풍이며, 핏줄을 이어가는 결속인 것을 난 어릴 때부터 배워 가기 시작했다. 언제나 먹을 것이 부족했던 시절이었지만 제사 음식을 그 많은 식솔들에게 적다 많다 따지지 않고 골고루 나누어 주시던 큰어머니, 음식을 먹으며 주고받았던 은은한 덕담들, 동네 길목마다 피어나던 무수한 들국화 덤불의 향기와 대숲에 쓰러지던 바람소리들과 정겨이 익어가던 열매들의 빛과 향기 속에서 자랐던 나는 아직도 고향의 숨결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이 땅의 축복받은 시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문우 박숙이 시인과 함께 찾은 모교인 와촌초등학교. 운동장 한쪽엔 수령 90년의 아름드리 플라타너스가 유년시절의 기억을 토해내고 있다.

예전에 대부분 논이었던 고향 들녘이 지금은 자두, 배, 복숭아밭으로 변했다

묘사철이 되면 보자기를 들고 떡을 얻으러 다니던 아름드리 소나무가 자라던 동네 뒷산, 대나무 우거진 집안 사랑채에 하얀 모시 적삼을 입으시고 앉아 계시던 증조할아버지의 기침소리, 제상에 어른거리던 은은한 불빛, 봄이 되면 앞산에 붉게 피던 진달래꽃을 꺾어 물빛 아른거리는 못가에 앉아 꽃잎을 따먹기도 했다. 추석이 되면 뒷산 소나무에 그네를 타던 즐겁던 그 시절은 까마득한 옛일이 되어 버리고 이제 그 아름답던 동네를 가로질러 생겨난 고속도로엔 자동차의 굉음소리만 요란하다. 양곡리에서 5리쯤 떨어진 방그리엔 아버지가 처음으로 지은 우리집이 있었다. 넓은 마당에 푸성귀와 옥수수, 감자, 콩 등을 심으신 어머니는 여름이 되면 감자와 고구마를 삶아서 우리들의 간식을 마련해 주셨고, 겨울에는 땅속에 깊이 묻어 두었던 무를 꺼내 깎아 먹었다. 그때의 간식으로는 보리를 찧어서 만든 시커먼 보리떡과 듬성듬성 콩을 박아 쪄낸 밀가루 빵이 자주 허기를 느끼던 우리들의 배를 채워 주었다. 따로 밭농사가 없었던 우리집엔 아버지가 울타리 삼아 심으신 자두나무가 자라 봄이면 하얗게 꽃이 피어 우리집을 감싸주었고, 여름이면 자두가 빨갛게 익었다. 다람쥐처럼 자두나무에 올라가 자두를 땄던 즐거운 기억은 영원히 잊지 못하는 고향의 추억으로 남아 있다. 가을이면 누렇게 익어가던 들판 속에서 메뚜기를 잡던 기억, 그때 그렇게 많았던 메뚜기들은 모두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저무는 동네 골목길에 무수히 날아다니던 잠자리 떼를 동무 삼아 놀았다. 추수철이 되면 학교에서 돌아오신 아버지까지 도리깨로 타작을 도우시고, 밤 늦게까지 달빛을 등불 삼아 탈곡기를 돌리며 바쁜 일손을 놓을 수 없었던 나의 고향집!

마당에는 내 키보다 훨씬 높은 가마니들이 가득히 쌓이고, 그 사이 사이를 숨어 다니며 숨바꼭질을 하고 놀았던 그리운 고향집!

그 아름다운 추억은 아직도 아련하게 떠오르는데 언제 누가 허물었는지 20여 호가 살던 마을 사람들은 흔적 없이 사라지고 산업화 시절의 어두운 얼굴로 서있는 공장들로 동네는 변해 있다.

옛날에 부처가 나왔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부처고개는 우리마을 사람들이 읍내로 가는 유일한 지름길이었다. 읍내에 5일장이 서면 어머니는 우리들을 남겨두고 그 고개를 넘어가셨다. 해가 떨어지고 어둑해지면 부처고개를 눈이 빠지게 바라보면서 어머니를 기다렸던 어린 우리들….

캄캄해져서 부처고개가 보이지 않을 때가 되어도 어머니가 돌아오지 않으면 나는 제일 어린 동생에게 머리를 긁어보라고 시켰다. 어린 동생은 멋모르고 머리의 젤 윗부분을 긁어댔다.

그것은 곧 어머니가 집 가까이 왔다는 신호이기도 했다. 그렇게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고 있으면 어머니는 거짓말처럼 캄캄한 어둠 속에서 우리를 향해 걸어오고 계셨다. 집안의 맏딸로 태어난 나에게 두려움과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용기와 믿음을 주려 했던 어머니의 가르침이기도 했다.

아무런 통신 시설이나 문화 혜택이 없었던 그때, 철모르는 어린아이의 몸짓을 빌어 집을 떠난 가족의 안전을 믿으려 했던 산골 사람들의 지혜로움에 고개가 숙여지기도 한다.

나의 아버지는 경산군에 있는 초등학교는 거의 모르는 데가 없을 만큼 오랫동안 경산군의 학교에 재직하셨는데 농사일과 집안일을 어머니에게만 맡기시고, 항상 커다란 가방을 들고 바람처럼 왔다가 가시곤 하셨다. 일요일이 되면 나를 자전거에 태우고 5일장이 서는 읍내로 가서 국밥을 사주시기도 하고, 동생들에게 줄 떡도 사주시던 다정다감한 분이셨다.

가끔씩 해야 했던 객지 생활이 외로워서일까. 아버지는 술을 참으로 좋아하셨다.

거나하게 술에 취하시면 '성불사의 밤'을 쓸쓸하게 부르시던 아버지… 젊은 아버지의 청아한 목소리는 아직도 귀에 쟁쟁한데 아버지는 쉰여섯에 세상을 떠나셨다. 떠나시기 며칠 전 제자들에게 선물 받은 소중한 만년필들을 내 손에 쥐여주며 열심히 글을 써서 좋은 작가가 되라는 말씀을 잊지 않으셨다. 떠나온 고향과 아버지를 그리며 쓴 나의 졸시 “離鄕”을 끝으로 나의 고향이야기는 끝을 맺으려 한다.

-離鄕-

아버지/ 당신이 나를 도시로 보내지 않았다면/당신이 지켜오던 고향 냇가에 앉아/

당신의 고무신을 하얗게 씻으며/살고 싶었습니다.

느티나무 울창한 운동장에 앉아/꿈처럼 들려오는 풍금소리 들으며/영롱한 시를 쓰는 시골 여선생님으로/ 그냥 그렇게 살려 했습니다.

옹기종기 정답게 우물가에 피던/붉디 붉은 작약꽃을 바라보면서/도시로 떠나버린 첫사랑을 그리는/고운 여자로 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나를 보내놓고/얼룩진 고무신 그냥 신으시고/바쁜 듯 저승길 혼자 가셨으니/십수년 작약꽃을 나는 못 보았네요.

세월은 나를 용서하지 못하고/나도 세월을 용서하지 못한 채/어디선가 들릴 듯한 풍금소리 그리워/도시의 어두운 찻집에 앉아 /쓰디쓴 커피만 마시고 삽니다.

황영숙 시인

덧글 0 개
덧글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