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하청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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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나의 살던 고향은] (25)아동문학가 하청호의 영천 신녕 매양마을
아트코리아 | 조회 1,157
2011.12.17
 
[나의 살던 고향은] (25)아동문학가 하청호의 영천 신녕 매양마을
 
공비 표적됐던 아버지, 2·28로 취조받은 형…아픔과 그리움의 대상


나의 고향은 팔공산 동북쪽 끝자락 영천시 신녕면 매양리이다. 그리고 현재 조그만 흙집을 지어 살고 있는 곳은 팔공산 북쪽 사면의 군위군 부계면 현창마을이다. 고향에서 서쪽으로 공산폭포가 있는 치산을 지나면 20여분 거리에 있다.

이곳은 고향과 외가(군위군 의흥면 배엘마을)의 중간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현창마을에 삶의 터를 잡은 것은 고향과 외가의 흙과 바람을 가까이에 두고 싶어서다.

나에게 고향은 회한과 아픔, 그리고 그리움이다. 유년의 추억이 살아 숨 쉬는 매양마을. 멀리 팔공산 자락은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인 데 초겨울 삭풍이 부는 매양 들녘이 이리도 허전한 것은 꿈도 못 피운 채 먼저 간 형에 대한 애틋함 때문일까. 형아, 그리운 형아….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영천에서 의성으로 가는 국도에서 신녕우체국 앞 삼거리 부계 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신녕천이 흐른다. 이 다리를 건너면 유년의 추억이 고스란히 살아 숨 쉬는 매양마을이 나온다. 나에게 고향은 회한과 아픔, 그리고 그리움이 점철되어 있다.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지고 눈자위가 젖어온다.

그래서일까, 나는 가끔 신녕 장날(3, 8일장)이면 장터에 간다. 꼭 무엇을 사기 위해 가는 일도 있지만, 그냥 가기도 한다. 그곳에서 고향 사람도 만나고, 장터국밥도 한 그릇 사먹으며 유년시절의 기억을 떠올리기 위해서다.

 

오랜만에 찾은 내 고향 경북 영천시 신녕면 매양리. 어릴 적 살던 고향집은 사라지고 사촌 형님댁 큰집이 빈집으로 우두커니 고향을 지키고 있다

 

 

내가 대여섯 살쯤으로 기억된다. 동존 상잔의 비극인 6`25전쟁이 일어나기 전, 늦가을 어느 날이었다. 그날은 부산에서 공직에 계시던 아버지가 모처럼 집에 왔다. 그날 아버지는 화려한 서양 그림이 그려져 있는 작은 양철통에 뽀얀 가루와 함께 담겨 있는 사탕을 우리 형제들에게 나눠주었다. 내가 지금까지 먹어 본 적이 없는 매우 맛있는 사탕이었다. 그날 저녁 우리 형제들은 참 행복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고향과 외가의 흙과 바람이 그리워 고향 인근 현창마을에 마련한 흙집. 본가 앞마당에 반쯤 헐린 담배 굴을 수리해 글쓰는 공간으로 마련했다.

 

그날 밤 비극적인 일이 우리 마을에서 일어났다. 한밤중이었다. 곤히 잠든 우리들을 어머니가 다급하게 깨웠다. 나는 영문을 모르고 일어나니 밖에는 총소리가 나고 비명소리와 함께 어지럽게 뛰어다니는 발자국소리가 들렸다. 가끔 말로만 듣던 무장 공비가 팔공산에서 내려왔던 것이다.

아버지는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했다. 후에 생각하니 아버지는 공직에 재직 중이었기 때문에 표적이 될 수 있었다. 이때 어머니는 침착하게 기지를 발휘하였다. 우선 아버지를 부엌에 있는 솔가지와 갈비를 쌓아놓은 무더기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우리 형제들을 뒷담 밖으로 넘겨 돌무더기 밑에 숨어 있도록 하였다. 아버지와 형제들을 피신시키고 얼마 후, 공비들이 집으로 들이닥쳤다. 다짜고짜 총과 칼을 들이대며 아버지가 있는 곳을 말하라고 윽박질렀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부산에서 오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하였다. 공비들은 몇 번이나 위협했지만 어머니는 그 위협에 굴하지 않고 끝내 아버지가 있는 곳을 말하지 않았다. 공비들은 집안을 뒤진 후 부엌으로 들어갔다. 겹겹이 쌓인 갈비 위를 총검으로 푹푹 찔러본 후 밖으로 나왔다. 밖은 어둠이 점점 옅어지고 신녕천 제방에서는 경비대의 총소리가 다급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공비들은 서둘러 마을을 빠져나갔다. 방으로 들어온 아버지의 바지에서 피가 배어나고 있었다. 총검에 찔렸던 것이다.

 

 

아침이 되자 사람이 희생당한 집에서는 가슴을 에는 울음소리가 들려왔고, 몇몇 집은 불길에 휩싸였다. 마을에서는 크고 우람했던 큰집도 시뻘건 화염에 휩싸였다. 불길은 점점 세차게 타올라 기왓장은 열기에 깨어져 탁탁 튀었다. 우리 가족과 형제들은 그저 멍하니 쳐다볼 뿐이었다. (위 글의 일부는 부모님께 들은 당시의 상황을 참조함)

그날이 있던 다음 해, 우리 가족은 아버지의 근무처인 부산으로 이사를 갔다. 그리고 몇 년 후, 대구에 정착하였다.

나는 성장하면서 점차 유년 시절의 사건을 잊어갔다. 그러나 세 살 위인 형 하청일은 가끔씩 그날의 두렵고 참혹했던 기억을 되살리곤 했다. 아마도 그때의 충격이 뇌리에 상흔으로 남아있었던 것이리라. 형은 경북고등학교에 입학한 후 사회의 제반 현상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독서 경향도 철학과 문학, 사회학 서적에 탐닉했다.

1960년 2월 28일 2`28민주운동이 일어났다. 이날 형 하청일(당시 경북고 3년)이 작성한 2`28결의문이 낭독되었다.

‘인류역사에 이런 강압적이고 횡포한 처사가 있었던가. 근세 우리나라 역사상 이런 야만적이고 폭압적인 일이 그 어느 역사 속에 끼어 있었던가?

오늘은 바야흐로 주위에 공장연기를 날리지 않고 6일 동안 갖가지 삶에 허덕이다 모이고 모인 피로를 풀 날이요, -중략-

백만 학도여! 피가 있거든 우리의 신성한 권리를 위하여 서슴지 말고 일어서라.

학도들의 붉은 피는 지금 이 순간에도 뛰놀고 있으며 정의에 배반되는 불의를 쳐부수기 위해서는 이 목숨이 다할 때까지 투쟁하는 것이 우리들의 기백이며 이러한 행위는 정의감에 입각한 이성의 호소인 것이다. -후략- (2`28 선언문 일부)

2`28 민주운동은 우리 가족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당일 형은 밤늦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4, 5일이 지난 후 형은 실성한 사람처럼 집으로 돌아왔다. 어머니는 아무 말도 묻지 않았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형은 한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당시 형은 선언문을 작성한 주역일 뿐만 아니라, 더욱이 학생 신분이 아니었기 때문에 (공납금 미납으로 제적, 후에 복학) 누구에게도 보호를 받지 못하였고 힘겨운 취조를 받아 가끔씩 정신불안 증세를 보이기도 했다.

그 후 형의 몸은 점차 피폐하여 갔다. 군에서의 사고로 의병제대를 한 형은 간경화에다 정신적 질환까지 겹쳐 내일을 기약할 수가 없게 되었다.

어머니와 형제들은 형의 남은 생을 평안하게 보내드리기 위해 경주 인근의 암자에 머물게 했다. 형은 고향을 그리워했다. 신녕천과 마을 숲 앞 냇가에서 불치기(밤에 막대기 끝에 헝겊을 두르고 석유불을 밝혀 고기를 잡는 놀이)를 하며 놀던 일, 마을에서 팔공산 쪽으로 들어간 ‘어리골’ 못에서 보리등겨를 짚불에 구워 밑밥으로 던져놓고 민물새우를 잡던 일 등을 떠올렸다. 그리고 민물새우를 넣어 끓인 된장찌개를 먹고 싶어 했다.

나는 당시 형에게 내년 여름에는 꼭 ‘어리골’ 못에 가서 민물새우를 잡아 된장찌개를 맛있게 끓여 밥상을 차려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그러나 형은 다음 해 여름이 오기 전 12월 하순, 진눈깨비가 몹시 내리던 날, 젊은 날의 꿈을 뒤로 하고 한 많은 생을 마감하였다. 불혹을 조금 넘긴 나이였다.

그때 애통한 마음으로 쓴 시를 다시금 되뇌어 본다.

형아 형아

흙바람 이는 /고향 산비알

엉겅퀴 엉겅퀴처럼 /

엉켜 살자던 /형아, 형아//

비어서 비어서

더욱 서러운 겨울 하늘

별똥은 /저리도 눈물겹게

또 내리고//

한숨으로 빛바랜/ 울 어매

하얀 치맛자락

바람꽃으로 이는데//

이 하늘과 땅

어느 흙바람 속에/

푸른 귀를 세우는가//

형아 형아/ 밟아도 밟아도

푸른 서릿발로 일어서는

청보리 청보리 같은.

나에게 고향은 현대사의 질곡을 온몸으로 부딪치며 살아온 가족의 아픔과 회한의 대상이다. 아울러 어머니의 모태 같은 안식처이며, 그리움의 대상이기도 하다.

지금은 내가 유년을 보낸 집터는 흔적도 없고, 불타버린 옛 큰집은 밭으로 변해 있다. 그 후 소년 시절부터 수년 전까지 오고 갔던 새로 지은 큰집은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빈집이다. 담쟁이가 뒤덮은 담배 굴은 을씨년스럽게 높이 솟아 있다. 가까운 친척이 모두 떠나버린 고향에는 반겨 줄 사람 하나 없지만, 고향에 들릴 때마다 변치 않고 흐르는 냇물이 반갑고 바람마저 예사롭지 않다.

그렇다, 누가 반겨주지 않으면 어떠랴! 고향의 흙과 바람은 나의 몸과 영혼을 키워주었으며 나의 몸에는 아직도 생기로 남아 있다. 그리고 메마르지 않은 나의 문학의 원천이기도 하다. 나는 고향에 가면 아픔과 회한, 그리움의 심상이 복합적으로 엉켜 나를 혼란스럽게 한다. 그러나 어쩌랴. 아픈 과거도 내가 보듬고 가야 할 고향의 한 부분인 것을. 오늘도 나는 고향의 흙과 바람을 온몸으로 느끼며, 떠나간 그리운 사람들의 얼굴을 찬 겨울 하늘 속에 떠올려 본다.

(아동문학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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