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29    업데이트: 22-01-11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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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경 작가의 회화-‘기(氣)’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 치바 시게오
관리자 | 조회 801
금경 작가의 회화-‘기(氣)’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치바 시게오
 
1. 인체 표현에서 시작된다.


금경 작가의 작업실을 방문했을 때, 이전에 작업했던 방대한 양의 누드화에 놀랐다. 그녀는 추상화로 전환한지도 꽤 지났지만, 작업실에서 이러한 누드화와 그 이후에 작업된 추상화들을 비교할 수 있다는 것은 굉장히 흥미로운 일이다.
이전에 작업한 누드화들은 물론 추상이 아니다. 금경 작가의 작품특징을 말하자면, 전체적으로 “드로잉적”인 느낌이라고 말할 수 있다. 회화작품이지만 색채를 별로 고려하지 않았다고나 할까, 회화작품으로써는 두드러지게 보이지 않지만 “드로잉적”인 부분에 주목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다만, “드로잉적”이라고 하지만, “형태”를 정확하게 잡아내고자한 느낌도 아니고, “선”에만 매달리는 느낌도 아니다. 인체의 여러 부분인, 피부, 눈, 입, 뺨, 머리카락 등의 묘사를 한다든지, 인체 본연의 “형태”의 바리에이션에 관심은 없어 보였다. 하물며 인물의 표정에도 그닥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닌 듯하다. 그런 것보다도 작가의 관심은 오히려 전체 공간에 더 있는 듯하였다. 그렇다고 인체에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무의식속 가운데 인체 너머의 공간을 바라보며, 그런 경험들이 쌓여, 결국 추상화로 전환하게 된 것은 아닐까. 인물화가 아닌 누드화를 작업한 것에는 의미가 있다. 누드가 아닌 인체는“공간” 속에 직접적으로 존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작품들은 “드로잉적”인 것보다 결과적으로 추상작품들을 위한 “습작”이었다는 의미로 “습작적”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맞을지도 모른다. 누드를 그리면서도 금경 작가의 시선은 인체의 주변을 보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내가 처음으로 본 금경의 작품은 추상작품이었으며, 그 후에 초기 누드작품들을 보아서인지, 반대의 순서로 보는 것이 진실을 명확하게 하는 경우도 있다. 주제는 인체지만, 인체는 이른바 “모티브”이며, 진짜 또는 숨겨진 “주제”로는 인체를 포함한 공간 전체였던 것은 아닐까.
물론 이러한 말 표현이 지나친 것일지도 모른다. 작가에게는 추상회화로 전환한 지금도 모티브 또는 주제로써의 “인체”가 작가 자신 속의 어딘가에 숨어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이미 과거의 추억으로써 남아 있을 것이다.

2. 나는 이런 식으로 상상한다.

나는 이런 식으로 상상한다. 작가는 인체 작업에 상당한 시간을 쏟아 왔다. 작업실에는 한 명의 인물이 있는 것뿐만 아니라, 작업실의 공간 속에서 그 공간과 함께 있는 동시에 그 속에서 존재한다. 그 곳은 계절, 날씨, 시간대에 따라 빛과 분위기가 달라진다. 빛과 분위기가 달라진다는 것은 “공간” 자체가 달라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공간 전체가 층을 이루며 작가의 경험 속에서 쌓여간다.
이에 따라, 작가는 추상작품으로 전환하게 된다. “추상”이기에 구체적인 “형태”에서는 일단 벗어나게 되는 것이지만, 추상이라고 해도 이미 세계 2차 대전 이전부터 존재했던 기하학적 추상(차가운 추상)이나 유기적인 형태의 추상, 세계 2차 대전 이후의 추상표현주의(Abstract Expressionism), 단색화, 미니멀 아트, 후기 회화적 추상(Post Painterly Abstraction)과 같이 분류되는데, 이 같은 추상기법들을 흉내 낼 수는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될까? 외관상으로는 다소 유사하더라도 이와는 또 다른 개성을 나타낼 필요가 있다.
금경 작가는 이론적이라기보다 감각적으로 작업하는 형식으로, 여러 가지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끊임없이 노력하는 작가이다. 인체를 비롯한 현실 세계에 있는 모든 물체 형태의 표현을 금하였을 때, 작가의 무의식에서 감각적으로 드러나게 한 것은 인물 주변에 둘러싸고 있는 면적, 즉 “공간” 그 자체에 있었다.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그리고 표현하는 것에 있다. 회화는 평면예술이라 “보여 지는 방법”또한 평면적으로 되기 때문에 좀처럼 표현하기가 쉽지 않다.
작가가 항상 염두 하는 것 중에 하나는 마음이나 감각, 정신적인 힘(에너지)를 중심으로 작업하는 것이다. 마음, 감각, 정신, 힘(에너지)이라는 것은 사실 작가에 따라 그 표현방법이 다 다르기 때문에, 그것을 믿고 추상세계를 묘사한다면, 겉으로는 다소 기존의 추상작품과 유사하다 하더라도, 어느 정도까지는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작가의 “기화(氣畫)”라는 작품제목과 같이 실체가 없는 것을 상징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것을 말할 수 있다. 작가는 이러한 시행착오의 길을 걸어왔다. 하지만 작가는 이것만으로는 충분히 만족할 수 없었던 것이라 생각한다.

3. 무엇을 어떻게 그릴 것인가?

작업실에서 인체 모델의 존재는 없어진다. 작업실은 공허해지고 그 공간에 남겨진 작가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공간” 그 자체로 나아가고자 하는 작가에게는 무엇이 가능할까?
추상회화가 시작된 것은 서양의 르네상스 말기에 시작된 “근대미술”이 끝날 무렵에 들어와서 한참 이후였지만, 그 후로 100년이 지난 현재, 세 가지의 표현 방법으로 나눌 수 있다. 자기 자신의 내면(신체적 또는 정신적 내면)에 집중하거나 자기 자신의 겉면에 집중하거나 그 양쪽을 화면에 담는 방법이 있다. 자신만의 오리지널리티를 모색하는 작가라면 누구든지 이 세 가지를 동시에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말하는 것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그 이유는 현실세계에 존재하는 물체 형태의 표현이 금지된 상황에서 “공간” 그 자체를 구현해내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즉, 예를 들자면, 자신이 있는 레 로브(Les Lauves) 언덕의 일부분을 화면 하단부분에 그리고, 화면 윗부분에는 생트 빅투아르 산(Montagne Sainte-Victoire)을 묘사하여 엑상 프로방스(Aix-en-Provence) 공간을 표현하는 것처럼, 본래에는 어떤 물체에 의존하여 그릴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공간”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공간”이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범위”즉, “무(無)”라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무(無)”를 그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화면 전체를 밝은 청색으로 덮음으로서 이것이 쾌청한 하늘이라든지, 화면을 새까맣게 칠함으로서 이것이 우주의 암흑공간이라고 하면서도 별다른 의미가 없다. 또한 새빨간 격렬한 선을 화면 속에서 뛰어다니는 것이 내 자신의 불타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주장을 하거나, 회색을 조금 섞은 차분한 흰색으로 화면을 채워서 이것이 바로 작가의 정신 그 자체라고 주장하여도 의미가 없다. 근대미술이 결국 맞이한 것은 근본적인 사상이 있는 작업방식에 있다. 화면상에 현실세계의 물건 형태를 눈에 보이는 대로 재현하고자 하는 리얼리즘 자체가 이미 근본적으로 막다른 상태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19 세기 후반 이후, 서양의 인기있는 화가들은 누구나 어느정도 느꼈으며, 작가들마다 나름대로 리얼리즘을 뛰어넘는 사상과 방법을 찾았다.
그러한 탐구 속에서 하나의 궁극적인 방식, 또 다른 의미로는 필연적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추상회화이다. 추상회화는 리얼리즘의 근본인 “대상”(주제)을 “어떻게 그릴지”(방법)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로부터 시작하게 되었다. 먼저 생각하고 바라보자-현실세계에 존재하는 대상을 “주제”로 할 수 없게 되었으며, 그에 따른 눈에 보이는 대로 재현해내는 “방법”도 무의미해진 것이다. 이러한 작품 사상은 무서울 정도로 혁명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로부터 다시 100년이 지난 현재에도 “리얼리즘”밖에 모르는 작가들이 이 세상에는 무수히 많이 있다. 아니, 리얼리즘을 고집하는 것이 대다수이며, 학교에서는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보이는 것을 보이는 그대로 그려볼까요? 태양은 둥글고 노란색이죠.”라는 식으로 가르치고 있다.

4. 추상으로

최근 회화 작품의 경향을 살펴보면, 예전부터 내려오는 “리얼리즘”을 전통방식 그대로를 고집하는 작가들로 구분을 짓는다면, 반대로 현실세계에 존재하는 대상을 이용하여 묘사하는 것처럼 보이면서 사실은 과거의 “리얼리즘”과는 전혀 다른 방향을 지향하는 작가들, 또 한편으로 추상회화라는 아직은 새롭지만 어려운 사상에 직면하고 있는 작가들이 있다. 금경 작가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추상회화를 시도하기 시작하였다.
작업실에 방문하여 이전 작품들을 보면, 금경 작가가 어떠한 과정을 거쳐 추상작품에 매진해 왔는지 잘 이해할 수 있으며, 작품제목에 “기(氣)”로 선택한 이유도 알게 된다. 수많은 인체를 묘사하는 시도 속에서, 작가는 반복 작업에 따른 한계와 의문을 느껴 추상회화로 전환하게 되었다. 추상이라는 방법으로 인체를 표현하는 것이 작가에게 주어진 것을 펼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인체를 묘사하는 동안 느꼈던 것들을 통해 작가는 “기(氣)”라는 타이틀을 붙였지만, 이전과는 다른 지평에서 “기(氣)”를 표현하고자 생각하였다.
작가는 인체표현의 어느 부분에서 한계점과 의문을 느꼈던 것일까? 누드작품에 작가의 관심은 오로지 인체 그 자체에 있으며, 배경에 특별한 특징은 없다. 작가의 20세기까지의 작품들을 대략적으로 말하자면, 구상적인 누드작품(작품에는 아직 “기화(氣畫)”라는 작품명을 붙이지 않았다)과 구상에서 멀어진 작품(작품제목은 “기화(氣畫)”라고 붙였다)이 있다. 후자에는(내가 본 바로는)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비유해서 말하자면, 피카소 같은 느낌으로 유기적 추상과 같은 작품(데생이나 드로잉과 같은 느낌), 인체의 형태가 희미하게 남아있지만, 이것이 화면 전체에 잘 녹아든 작품, 수목과 같은 굵은 선이 밀림처럼 서로 뒤얽혀 있는 작품들이 있다. 21세기에 접어들면서, 두 번째, 세 번째와 같은 작업 방식으로 서로 어울리며 현재의 작품들로 이르게 되었다.
그렇기에 적어도 20세기 동안에는 작가의 작품표현은 “인체”에 대한 것들이었다. 그에 따른“모티브(동기)”는 물론“인체”이다. 그러나 21세기에 접어들어 추상으로 전환하면서 동반해온 작가의 표현에서 “인체”의 그림자가 희미해지고 사라져 가게 되었다.
 
5. 작품의 주제라는 것은 무엇인가

처음에는 “모티드(동기)”도 “주제”도 모두 인체였다. 작가가 “추상”을 의식할수록 인체는 단지“모티브(동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머지않아 인체가 (“모티브”로도) 사라져 없어지는데, 그렇다면 무엇이 작가의 “주제”가 되는 것일까? 이것은 “인체표현이 작가에게 주어진 것”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은 어떻게 구현되어졌는가? 라는 궁금증이 생긴다.
본디“인체표현이 작가에게 주어진 것”은 작가의 감각, 정신, 마음, 사고, 감정의 전체적인 부분을 작가 자신의 언어를 사용하여 “기(氣)”라고 붙인 것으로 이것이 “주제”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구체적인 인체의 형태가 사라진 단계에서 작가는 작품제목을 이미 “기화(氣畫)”로 붙였는데, 영문으로는 “life-story” 즉, “인생”, “삶의 역사”, “생명의 역사”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기(氣)”자체는 묘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기(氣)”라는 것은 “형태”를 형상화할 수 없으며, “무(無)”는 아니더라도 “형태는 없다”. 구체적인 대상과는 다르게, 생각는 것이나 느끼는 것, 한 인간의 인생, 생명의 흐름과 같은 것을 형상화할 수 없다. 또한 같은 작품을 보더라도 의미를 해석하는 방법은 사람마다 전혀 판이할 수도 있다.
이 질문을 다음과 같이 바꾸어 말할 수 있다-“기(氣)”의 추상화를 가능하게 하는 작업방식은 무엇일까? 또는 “기(氣)”를 최대한 “기(氣)”그대로를 표현할 수 있는 작업방식은 있는 것일까?
먼저 냉정하게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하자면, 작업방식은 따로 없다. 어차피 무엇인가에 가탁할 수 밖에 없다. 현실 세계와 상상의 세계에 존재하는 대상이나 일에 빠진다는 것은 기존의 리얼리즘 작업 방식은 이젠 거의 사라져 가고 있다. 남아 있는 것은 추상이라는 형식 외에는 좀처럼 생각할 수 없지만, 그것조차도 기존의 추상회화 방식에서는 극히 어려울 것 같다.
여기서 나에게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추상회화의 등장은 대상이나 사건을 재현하는 것이 반드시 그 작품의 본래 주제는 아니었다는 것을 부각시켰다고 말할 수 있다. 사실 회화에서는 그런 부분까지 감추어져 있던 부분이었으며, 더 깊고 진정한 주제가 있다. “공간 그 자체”-이것이야말로 회화에서 가장 깊은 주제인 것은 아닐까?
동양의 삼원법이나 서양의 원근법은 도대체 무엇을 표현하고자 한 것이었을까? 그것은 본래 그저 사람의 눈을 속이는 트릭(트롱프 뢰유: trompe l'oeil)이 아닌, 레 로브 언덕과 생트 빅투아르 산 사이의 공간처럼 “공간 그 자체”를 착시가 아닌 실체로써 관람객에서 느끼게 하고자 하는 작가의 욕망으로부터 유래되었던 것이다. 평면 위에서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해버리면, 평면미술은 그저 단조로운 예술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한 불가능을 밟아 부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작품을 시도할 수 있는 것이다.
착시현상에 중점을 두고 있는 원근법 표현만으로는 “공간 그 자체”에 도달할 수가 없다. 처음에는 일루저니즘(illusionism)의 카운트 파트였던 추상회화는 100년이 지난 지금, “회화” 속에 가려져 있던 진정한 주제를 지향해야 한다. 따라서 금경과 같은 작가에게도 이미 존재하고 있을 “주제”, 앞으로 존재할 수 있는 “주제”는“공간 그 자체”일 것이다.
 
6. 공간 그 자체인 “기(氣)”

주제인 “공간 그 자체”도 원래 “형태”가 없기에 묘사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에 시도해야만 한다. 하지만, “공간 그 자체”라는 것은 물리적인 진공상태 같은 것이어서, 중립적인 것이 아닌, 실제로 존재하는 하늘이나 먼 우주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공간 속에서는 모든 대상, 생물, 현상들이 쉼 없이 일어나고 있다. 나는 그러한 “공간 그 자체”를 “자연”이라고 부르고 싶다. “공간 그 자체”라는 것은 “자연 공간”과 거의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자연=공간 그 자체”는 모든 정물과 물질, 현상들이 나타내는 “기(氣)”로 채워져 있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기(氣)”를 발산하는 것은 오직 인간이나 생물만이 아니다.
“공간 그 자체”에도 또한 “기(氣)”로 채워있는 것이다. 다만, 여기서 내가 말하는 “기(氣)”를 영문으로 번역한다면, 그것은“life-story”가 되지 않을 것이다. “세계”, “자연”, “공간 그 자체”는 다양한 “기(氣)”로 채워진다.
그렇다면, 금경 작가가 자신을 위해 반드시 해야 할 시도라는 것은 그리고 현재 시도하고 있는 것과 자신의 “기(氣)”로 표출하는 것을 통해 “공간 그 자체” 의 “기(氣)”에까지 도달하는 것이다. 자신의 “기(氣)”를 표출하는 대로 “공간 그 자체” 의“기(氣)”를 거듭나게 되는 것이며, 그에 따라 결과적으로 “공간 그 자체”를 표현하게 되는 것이지 않을까?
금경이라는 한 작가의 “기(氣, life-story)”가 추상회화의 새로운 시도를 통해 “자연”그대로의 “기(氣)”로 거듭 나아간다. 생각해보면, 모든 것의 생명은 “신”이 탄생시킨 것이 아닌, “자연”의 산물이다. 태어나기 전이나 죽은 후에도 인간은 결국 “자연” 속으로 되돌아가는 존재인 것이다. “되돌아가다”라는 표현이 과학적이지 않다고 한다면, 같은 의미로 사라져 간다라고 표현해도 좋다. 덧붙여 말하자면, 서양회화를 통해 추상회화 이후에 진전이 없었던 것은 동양인인 내가 바라본 바로는 “공간”이나 “자연”에 있어 서양인들이 받아들이는 인식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는 것은 신체도 정신도 몸도 모두 “공간”에 의해 이루어져 있다. 추상회화라는 것은 “인간” 그대로의 표현을 구현해내고자 하는 것이야말로 바로 그 본질이다.
서양회화는 오로지 “외계(外界)”를 그려내고자 우왕좌왕해왔다. 과거의 것이나 현재의 것도 포함하여 동양 회화의 의미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인간 그 자체”의 표현을 하고자 했던 것, 단순히 그려내는 것만이 아닌, 표현 또는 “실현”이라고 하는 곳에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김경진 번역: 무사시노 미술대학 동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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