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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그들_플루티스트 김민희
18/04/06 14:47:57 아트코리아 조회 2346

젊은그들_

노력의 시간에 기댄 연주

플루티스트 김민희


재능의 만개를 위한 노력의 기준으로 흔히 언급되는 1만 시간의 법칙. 플루트 연주자를 꿈꾸며 보통 하루 8시간, 많게는 14시간까지 연습에 몰두해 4년 만에 1만 시간을 넘어선 15살 소녀가 있었다. 그는 10년간의 미국 유학을 마치고 꿈에 그리던 연주자의 모습으로무대에 섰다. 독주자로서 만개한 지금도 여전히 연습뿐이라는 플루티스트 김민희(33) 씨. 서울과 대구에서 치러진 그의 귀국 독주회는 지역별로 각기 다른 프로그램이 꾸려져 눈길을 끌었다. “귀국 후 여는 첫 신고식인 만큼 시차를 두고서라도 제대로 된 모습을 선보이고 싶었어요. 무대를 찾아주신 관객에 대한 예의라고도 생각했고요.” 

지난해 있었던 서울 예술의전당 무대에서 그는 미국에서 연구한 대표 레퍼토리인 게오르크 뵘, 프로코피예프의 수준 높은 연주곡과 현대곡을 함께 엮어 전문 연주자 다운 무대를 선보였다. 이어 지난달 대구 무대에서는 말라르메의 「목신의 오후」를 모티브로 한 드뷔시의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을 비롯해 문학에서 모티브를 얻은 낭만 음악을 중심으로 관객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갔다. 이는 시인인 어머니께 감사의 마음을 담아 바치는 헌정 무대이기도 했다. 


전력 질주했던 지난날 
김 씨가 플루트를 만난 것은 중학교 2학년 때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처럼 전문 연주자를 꿈꾸던 플루트 유망주와 친구가 되면서부터 자연스럽게 플루트와 친해졌다. 하루 8시 간 이상의 혹독한 훈련도 곧잘 몸에 익혀냈다. 호흡으로 불어내는 관악기의 특성상 강인한 체력과 인내심이 요구됐지만, 아무리 연습해도 도무지 질리지 않는 플루트가 마음에 들었다. 친구를 따라 처음 출전한 전국 단위 콩쿠르에서도 이름을 올리며 재능도 인정받았다. 이때부터 2015년까지 그는 꾸준히 콩쿠르 무대에 올랐다. 자연히 김 씨의 프로필은 국내 최고로 손꼽히는 중앙음악콩쿠르를 비롯해 시애틀, 사우스캐롤라이나, 애틀랜타 등 미국 콩쿠르까지 20회 이상의 입상 경력으로 화려하게 채워졌다. 그런 그에게 콩쿠르의 의미는 남다르다.

“콩쿠르에는 플루트 연주자라면 반드시 연주해야 하는 곡들이 응시 곡으로 오르기 마련인데, 나중에는 입상과 상관없이 이 곡들을 완벽하게 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콩쿠르에 일부러 응시했어요. 콩쿠르는 음악적 깊이는 물론, 다양한 음악 스타일과 색채를 편견 없이 넘나들 수 있도록 저를 이끌어 주었습니다.” 

이처럼 음악의 질적 완벽을 추구해온 그는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졸업한 후, 미국 매네스 음악대학 석사, 맨해튼 음악대학박사과정을 통해 다양성의 폭도 넓혀 나갔다. “저를 행복하게 하는 세 단어가 있어요. 17년간 함께 살았던 강아지, 플루트 그리고 뉴욕이죠. 그저 시키는 대로 잘 따라 하던 모범생에서 뚜렷한 정체성을 가진 연주자이자 인간으로 살게 해준 곳이 미국이에요. 스스로 개척하는 환경도 매우 잘 맞았죠.” 

자유분방한 환경 속에 날개를 단 그는 학업과 콩쿠르 등 빡빡한 일정 속에서 또 다른 꿈을 품게 됐다. 바로 교육자로서의 김민희다. 여러 콩쿠르에서 입증받은 실력과 정평이 날 만큼 많은 연습량을 통해 쌓은 신뢰로 뉴욕 마하나임 대학교 강사, 뉴욕 클래시컬 유스 오케스트라 지도 등을 맡기도 했다. 특유의 열정으로 아메리칸 프로티지 인터네셔널(American Protege International)에서 2년 연속 교육자상을 받고, 콩쿠르 심사위원으로 활동하는 등 교육자로서도 인정받았다. 귀국 직전에는 카네기홀, 링컨 센터 등 최고의 무대에 초청받아 솔리스트로서 무대에 섰다. 이로써 미국에서 이루고자 한 꿈을 모두 이뤄낸 그였다. “아마 남들처럼 3년, 4년만 뉴욕에 머물렀다면 이런 큰 기회는 없었을지 몰라요. 10년 동안 맨해튼 붙박이로 살다 보니, 다양한 활동이 가능해졌죠. 어머니는 늘 ‘너는 네가 한 것의 딱 십 분의 일만큼 더 얹어 돌려받는 것 같다.’ 고 말씀하시는데, 정말 맞는 것 같아요. 적당히 준비하고 큰 보상을 받았다면 아마 이만큼 해내진 못했을 거예요.” 
 

지난해 서울예술의전당에서 연 리사이틀 연주 장면


다시금 새로운 꿈을 위하여 
이렇게 10년간의 유학 생활을 성공적으로 마친 그는 2017 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최선을 다한 만큼 빛나는 영광을 기대했지만, 그를 기다리는 것은 활동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다시 분투해야 하는 시간이었다. “한국에서도 연주자와 교육자로서의 활동을 이어가고 싶었던 저는, 귀국 후 초등학교 방과 후 교사 자리에 맨 먼저 문을 두드렸어요. 악기와 첫 만남이 이루어지는 어린 시절이 교육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제 이력이 부담스러웠던지 저를 받아주는 곳이 잘 없었죠. 다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전국을 대상으로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1년간 100군데 이상은 지원했던 거 같아요. 그 과정을 통해 얻게 된 여러 가르침의 기회가 제겐 너무나 소중합니다.” 

현재 그는 미국에서 함께 공부했던 동료들과 플루트 앙상블 ‘아이레’를 조직해 전국 활동을 펼치고 있다. 작년까지 영남필하모닉 단원으로 활동하는 등 지역 연주도 이어갔다. 그 외 독주 및 협연으로 다양한 무대에 서는 한편, 강남대, 경성대와 대구예술영재교육원 등에서 플루트를 가르치고 있기도 하다. 

“대구는 서울보다 더 많은 플루트 전공자가 배출되는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플루트 연주를 만나기가 매우 어렵더라고 요. 저는 대구 지역 연주자로 구성된 플루트 앙상블을 창단해 활동 발판을 함께 만들어가고 싶어요. 또, 솔리스트로서 전문 연주자만이 펼쳐낼 수 있는 학구적인 무대를 여는 것이 저의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훌륭한 연주자가 되는 것이 목표예요. 훌륭한 교육자의 동의어는 훌륭한 연주자라고 믿기 때문이죠.” 

 

글·사진|김보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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