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18    업데이트: 21-03-17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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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길로 옮긴 천지간(天地間) 삶의 노래 - 미술평론가, 미학박사 장미진
최영조 | 조회 954

붓길로 옮긴 천지간(天地間) 삶의 노래

-최영조의 회화세계-

 

미술평론가, 미학박사 장미진

 

1. 삶의 언어, 미술의 언어-그 영원한 유토피아에의 꿈

 

현대미술의 동향과 그 방향성을 돌아볼 때, 표현방법의 확충 뿐 아니라 이성과 감성의 조화 및 자연과의 융화를 통한 인간성 회복의 문제는 현대 작가들의 한 화두가 되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최영조는 인간과 자연의 융화를 꿈꾸면서 그에 대한 명상을 일관되게 그림으로 풀어내어온 작가이다. 구상과 비구상을 넘나드는 양식적 변용을 감수하면서도 그가 추구해온 조형의 세계와 그 예술의지의 방향은 자연과의 융화를 통한 인간성 회복이라는 면에서 일관성을 보인다. 경북의 시골마을에서 태어나 자연의 물기와 섭리를 직접 몸으로 체득할 수 있었던 것도 그의 작업의 한 계기가 되지만, 나아가 작가는 동양의 삼재(三才)사상을 바탕으로 대자연을 해석함으로써 일상 삶의 편린과 그 이미지들을 우주적인 천지간(天地間) 삶의 노래로 풀어내놓고 있다. 역시 삶의 언어가 곧 미술의 언어가 되는 지점에서, 작가는 잃어버린 현대인의 고향, 그 실낙원을 환기시킨다. 요컨대 그의 그림들은 붓길에 실린 형태와 색채의 리듬이면서 현실을 관통하되 현실을 넘어서 영원한 유토피아를 꿈꾸는 시적 상상력을 담지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그의 작품세계는 조형과 음악과 시를 아우르는 예술의 높은 경계, 곧 그림이 음악이 되고 시가 되는 지점을 향해 정진해온 작가의 창작 여정을 잘 반영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의 작업이 지니는 예술적 가치와 의미는 무엇인지, 우선 그의 창작 여정을 잠시 살펴보고, 나아가 몇 가지 항목으로 나누어 작업의 의의와 방향성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2. 삶의 덫을 넘어 자유로-창작의 여정

 

60년대 중반의 첫 개인전에서부터 2000년의 아홉 번 째 개인전에 이르기까지 작가는 표현의 영역을 확충ㆍ심화시키면서 지금도 여전히 부단한 열정으로 작업의 방향성을 모색해오고 있다. 1965년 1회전에서 선보인 작품들은 흑색과 회색, 갈색조의 바탕에 기하학적인 도형들이 등장하는 비정형의 앵포르멜 양식에 가까웠고, 또 한편에서는 추상의 형식적인 화면을 탈피하기 위해 헌 런닝이나 헌 장갑 등의 기성 오브제를 도입한 네오-다다 형식의 작업을 선보이기도 하였다. 그만큼 기존의 조형에 대한 부정의식을 바탕으로 새로운 조형가치를 창출하기 위한 모색의 시기였다고 할 만하다.

 

이러한 모색의 시기는 70년대로 이어지면서 물감의 마티에르와 색채의 톤을 중시, 표현주의적인 강렬한 색채의 구상계열 작품을 선보인다. 그러나 이 때의 색조는 어두운 색이 주조를 이루고 있고, 활달한 조형이면서도 채색의 대비 가운데 우울한 심연의 세계가 투영되고 있다. 삶의 덫을 넘어가려는 청년기의 열정과 갈등이 조형상의 방법적 모색으로 이어진 시기라고 할만하다.

80년대는 화면을 보다 밝은 다색조의 채색과 자유분방한 형식으로 운용하면서 자신의 세계를 적극적인 방식으로 외화(外化)하고 있다. 그만큼 현대 조형의 관념성이나 작가의 심적 우울함을 떨치고 그나름의 낙천성과 자유에의 염원을 원숙하게 가시화하고 있다. 이 때도 여전히 재료와 화면공간에 대한 다양한 실험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표현방법에 접근하는 작가의 정신적 필연성이 밀도있게 우려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를테면 두 층위의 공간으로 화면을 구분하여 하늘과 땅과 바다와 인간의 이미지를 습합하고 또 상충시키고 있으며, 모든 형상을 넘어 대자연과 우주의 섭리를 분방한 붓질과 그래픽적인 도형으로 번안해놓고 있다.

 

한편으로는 추상표현주의에서 볼 수 있는바와 같은 내면의 정념표출과 물감의 에너지 분출이 엿보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천ㆍ지ㆍ인(天地人)의 대립과 융화를 보편적인 조형언어로 번안하고자 하는 노력도 엿보인다. 하늘과 땅과 인간, 그리고 빛과 어둠이 결코 대립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로 통한다고 보는 동양적 예술사유의 편린이 여실히 반영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시기의 몇몇 작품들은 자연의 형상을 걸러내어 우주의 본질을 시각화한 만다라 도상에 근접하고 있기도 하다.

 

90년대 이후 현재까지 작가는 구상과 비구상의 양식적 틀에 구애받지 않고 자연과 인간의 융화감정을 표출할 뿐 아니라, 일상 삶의 이미지들을 도입하면서도 이상세계에 대한 염원과 생명에 대한 경외감을 분방하면서도 암시적인 조형으로 표현해오고 있다. 특히 〈천지〉시리즈 작업을 포함하여 일관되게 표현해온 바다와 여성상의 이미지, 그리고 시원한 여백 운용과 활달한 붓터치 및 밝고 맑은 색감의 운용 등, 그의 작품들은 보는 이에게 이미 특유의 감성과 색감으로 각인되고 있다. 그러므로 최근의 작품들은 삶의 질곡과 덫을 넘어 예술 속에서 자유를 추구해온 창작여정의 한 결실이라고 할 만하다. 이제 최화백은 작업의 모티브나 소재와 형식, 표현어법 등에 있어 이미 독자의 스타일과 개성을 지닌 작가로 자리매김되고 있다.

 

3. 작업의 위상과 예술적 가치 및 방향성

 

위와 같은 창작여정의 정신적 흔적들로서 그의 작업은 보다 구체적으로 어떠한 위상에서 어떠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그 의의와 방향성을 몇 가지 항목으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 작업 모티브와 작가의 이념 면에서 볼 때, 자연과 인간의 조화, 즉 자연의 인간화와 인간의 자연화라고 할 수 있는 유가적ㆍ도가적인 우주관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아크릴이나 유화물감과 같은 서양화의 재료를 사용하고는 있지만, 이 작가의 이념은 동양적 예술사유에 더 가까이 있다고 느껴진다. 하늘과 바다와 땅과 인간, 그리고 일상의 이미지들이 서로 습합하면서 부유하는 화면은 그대로 자연의 정수와 인간의 심상을 하나로 아우르는 경계를 드러낸다.

 

그의 그림의 소재로서 항상 등장하는 바다는 가장 지순한 색채와 환상으로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대변한다. 그리고 바다는 삶의 모든 질곡을 수평선으로 갈무리하면서 언제나 압도적인 침묵으로 자연의 섭리를 전한다. 이러한 바다의 이미지가 작가에게는 영원한 유토피아에의 이상을 암시하는 상징체로 형상화되고 있다. 청년기의 다양한 실험과 암울한 색조를 넘어 점점더 시원한 여백과 광채나는 밝은 색채로 화면을 운용해오면서 작가는 특유의 낙천성으로 생명과 사랑을 노래한다. 유토피아는 역시 현실에는 없는 우(U) 토포스(Topos)의 경계이다. 그러므로 모든 예술가들은 오히려 그것을 꿈꾼다. 최영조의 예술의지 역시 고답적이고 현학적ㆍ관념적인 데에 있지 않고 이상향에의 꿈을 통해 현실의 삶을 고양시키고자 하는 데로 방향지워지고 있다.

 

둘째, 위와 같은 이념을 구현함에 있어 작가는 표현의 다양한 방법 모색과 조형상의 실험을 병행해왔다. 특히 구상ㆍ비구상의 이분법적 사고를 지양하고, 추상적이고 합법칙적인 보편적 세계상의 표출 및 표현주의적인 감성의 노출, 그리고 자연상이나 인물과 기물 등, 일상의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반구상작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표현방법을 구사하고 있다.

 

역시 표현방식으로서의 양식이나 테크닉은 이념의 필연성에 좌우되는 것이라는 점에서 볼 때, 그동안의 작업들은 사실상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다. 나아가 재료와 매체에 대한 다양한 실험을 병행, 유채와 아크릴, 수채, 색종이 오려 붙이기, 천 오브제 등, 다양한 매체운용을 구사하고 있으며, 또한 페인트 붓을 사용한 넓은 색면 및 물감을 흘리고 뿌리고 번지게 한다든가 나이프로 긁거나 스크레칭 기법을 이용하는 등의 효과를 통해 자신의 예술의지를 밀도있게 구사해왔다.

 

셋째, 이같은 이념과 방법 모색을 통해 구현된 그의 그림들은 특유의 형식과 색감으로 보는이로 하여금 생명의 열락(悅樂)과 환희를 느끼게 한다. 특히 90년대 들어 선보였던 <천지>시리즈는 자의식의 표현과 자연의 이미지 조화, 환상과 실제, 우주의 시원적 이미지와 현실의 경계를 아우르면서 유토피아에의 꿈을 적절히 구사해내고 있다. 생명의 시원과 창조의 모체로서 물의 이미지는 다분히 상징적이고 신화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지만, 작가는 실제로 세계 여러 곳의 바다를 여행하며 현장 작업을 하기도 한다. 그의 그림속에서 몸에 배어 우러나온 듯이 보이는 코발트 불루와 마린 불루의 색조는 보는 이의 가슴을 시리게 하는 생생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넷째, 그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붓터치의 생동감은 현장작업 뿐 아니라 화실에서의 그의 작업방식에서도 기인한다. 그는 때로 화실 바닥에 50여점의 화포를 깔아놓고 동시에 작업을 하기도 하는데, 이 때 주로 음악을 들으면서 즉흥적으로 이 색 저 색을 화면에 올린다. 음률을 타고 색이 뿜어져 나온다고나 할까, 일회적인 붓질로 마음의 상념과 자연의 이미지들을 함께 물들여나가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 음악과 시와 그림은 따로가 아니라 하나이다.

 

또한 하늘과 바다와 산과 여인의 실루엣 등도 서로 얽혀 있어, 산인가 하고 보면 여인의 몸 실루엣이고, 바다인가 하고 보면 바로 하늘이고 다시 여인의 얼굴이 된다. 그의 화포 안에서는 자연과 인간이 하나로 통한다. 이러한 지점에서 밝은 색채의 음률을 타고 율동감 있는 삶의 이야기가 서술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화면의 어느 부분은 과일그릇이나 화병 등이 있는 실내가 되기도 하고, 또한 어느 부분은 만물 생성 이전의 우주적 카오스로 느껴지기도 한다. 이같이 그의 회화는 캔버스 평면공간을 일상적 시ㆍ공간을 넘나드는 환상의 공간으로 확장하고 있는 점에서 이념 구사를 적절히 하고 있다고 평가할 만하다.

 

끝으로, 이상과 같은 작가의 개성과 작업의 예술적 가치 및 의의를 돌아보더라도, 한편 아쉬운 것은 때로 눈에 띄는 작위적인 요소가 작품 전체의 정조전달을 거슬리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인물의 실루엣 중 얼굴부분이 반복 묘사되면서 매너리즘에 빠지고 도안화된 느낌을 주는 것은 붓터치의 분방함과 생생함을 상쇄시킨다.

 

어떤 면에서는 이미지들을 좀더 표백시키고 바탕 공간을 시원한 여백으로 처리함으로써 여의(餘意)와 여운의 깊이를 더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의 그림에서 푸른 색과 보라색 계통의 색조는 몇 개의 선과 면만으로도 그 운률과 여운을 감당할 수 있으리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의 회화는 역시 인간과 자연에 대한 관조와 명상의 산물이고, 후덕한 인간미와 생명체에 대한 무구한 사랑을 지니고 있는 작가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그만큼 그의 붓길을 따라 읊어지는 천지간 삶의 노래는 바로 우리 모두의 노래가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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