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18    업데이트: 21-03-17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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親 舊 崔 英 造 - 1996年 苐 7回展. 大邱每日 編輯部長 金英未
최영조 | 조회 646

親 舊 崔 英 造

 

1996年 苐 7回展. 大邱每日 編輯部長 金英未

 

어디선가에서 읽은 것인지 아니면 내 스스로가 그렇게 생각하게 된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나는 예술작품은 사랑할 수 있어도 그 작품을 만든 예술가는 좋아할 수 없을 것 같다는 고정관념 비슷한 것을 갖고 있다.

그 이유는 너무나 단순하다. 한 작품을 만들기 위해 예술가가 치르는 고뇌와 고통을 알기 때문이다.

한 작품을 산출시키기 위해 그처럼 고뇌와 고통을 겪는 작가를 옆에서 지켜볼 때 그 작가의 고뇌를 고통을 포용 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그 작가를 좋아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마치 産苦끝에 출산된 작품일수록 훌륭한 작품일 것이기 때문에 작품만은 좋아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마치 사과는 맛있게 먹는 사람이라도 사과나무를 가꾼 농부의 고생은 모르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할 수 있다. 나는 고등학교 때 어느 선생님이 아마추어도 음악을 할 경우에는 음악처럼 즐거운 것이 없으나 전공으로 하게 되면 음악처럼 고통스러운 것은 없다는 말을 예술가와 작품과의 관계를 생각할 때마다 되새겨 보고는 한다.

베토벤이자 모차르트나 그밖에 모든 위대한 예술가의 괴벽이나 편벽함도 같은 논리에서 이해하게 되는 반면 그럴수록 예술가에 대한 예의 내 고정관념은 더욱 굳어지기도 한다.

李文烈이가 쓴 [金翅鳥]에서도 예술가의 상황이 잘 묘사되고 있지만 鄭点植 교수께서 쓴 [現實과 虛想]이란 에세이집에선 예술가가 그렇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극명하게 드러나 있다.[현실 과 허상]의 첫 장에 나오는 [잃어버린 찬가]를 읽어보면 모든 위대한 예술작품 들은 그 시대의 흥망을 예시해주고 함축해 주고 있다. 여인상을 풍만하게 그렸느냐와 빈약하게 그렸느냐에 따라 그 시대가 흥하고 있느냐 쇠하고 있느냐를 읽어 낼 수 있다고 했다. 그것도 그 시대를 앞질러 예견해야 하기 때문에 사람의 눈으로 神의 意圖를 읽어내야 하는 아픔이 얼마나 컸었는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25時]의 작가 게오르규는 시인(예술가)은 잠수함 속의 토끼와 같아 토끼가 잠수함 속의 공기가 희박해진 것을 제일 먼저 알아내듯이 시인은 세상의 공기가 탁해진 것을 가장 먼저 알아내고, 알아낸 것을 외치지 않을 수 없기에 가장 먼저, 가장 혹독한 박해를 받게 된다고 말했다. 나는 화가 崔英造가 나의 친구란 사실에 대해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그것은 그가 그림을 그리는 존경스런 화가란 점도 있겠지만 아마도 많은 친구를 곁에 둘 수 있고 많은 친구들이 그의 곁에 모이지 않을 수 없는, 친구들이 좋아하고 싶은 품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예술작품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에 崔英造의 작품 세계에 대해서도 적어도 비평가적 입장에서는 들여다 볼 능력이 없다. 그림에도 내가 崔英造를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은 그가 내 친구이기도 하지만, 또한 이해될 수 없는 위대한 작품이란 그렇게 많지 않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崔英造의 작품은 나의 입장에서 보면 작가의도를 좀처럼 엿볼 수 없게 색깔의 배합으로만 만든 작품이거나 기하학적인 선의 연결에 의한 작품들이다.

그의 삼각형을 주제로 한 시리즈 작품이거나 흑․․․ㆍ, 적, 황색을 아무렇게나 버물러 놓은 것 같은 작품들이 잘 말해주고 있다. 그럼에도 崔英造의 작품에서는 저런것이 색의 조화구나 라든가 저런 색과 색깔 속에서 혹은 무의미하게도 보이는 삼각형의 다채로운 변형 속에서 작가의지를 구현할 수 있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된다, 원래 미술은 美學의 제일 대상이고 美學은 글자 그대로 아름다운 것을 추구하는 학문이다, [공포]라든가[잔혹] 같은 것도 드물게는 美學의 대상이 될 수도 있지만 그것은 [드물게]일 뿐인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崔英造의 작품은 反 美術的인 소재를 써 아름다운 것을 만들어내는 특출한 경우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이에 대해 崔英造가 쉽게 그린 그림이나 장난삼아 그린 듯한 그림에서 이해를 구하고자 한다. 그의 아틀리에나 거실에서 그려주는 신문의 연재 삽화는 단순한 선으로서도 너무나 예쁘게 그려낸 소녀상이나 꽂, 자기집 장식용으로 만든 토속적 소재를 가지고 다룬 作品을 보면 그의 가슴 깊은 곳에 뭉텅이로 잠재돼 있는 인간성, 인간미 그를 키워준 고향의 정겨운 고향을 만나게 된다. 崔英造는 43년 3월 1일 慶北 義城郡 安溪面 安定理에서 맏이로 태어났다. 그의 마을은 1백호 남짖한 전형적인 한국의 시골이다. 그의 부친 古稀때 잠시 둘러본 그의 마을은 지금도 牧歌的인 낭만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이런 곳에서 자란 그가 예술에의 길에 들어섰다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것이다, 그가 많은 예술분야 가운데 그림을 택한 것은 어쩌면 우연인지도 모른다. 그의 마음을 가까이에 있는 학교를 다닐 때 미술선생의 칭찬을 받은 것이 계기라면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옆 교실의 세종대왕상을 묘사해 자기교실에 붙여준 것을 본 선생은 崔英造의 미술에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를 격찬해 주었다. 崔英造는 결국 중앙 대 예대에서 미술을 전공했지만 어렵게 다닌 중 ․ 고교에선 미대와는 상관없이 교과 과정에만 매달려야 했다. 다만 낙서하듯 그림을 그리는 그런 소년이었다. 미술선생이 길러 낸 화가가 아니라 스스로 화가의 길에 들어 선 것이다. 朝鮮朝末의 張承業이처럼.... 崔英造는 이제 東國大 慶州 캠퍼스 문리대의 미술과장으로 많은 후진 미술학도를 키우고 있다.大邱에서는 新潮會 ․그룹80, 예동인전 대구 수채화의 동인으로서 맹활약 하고 있다. 지금 그에게는 부인 金景淑 여사가 열심히 내조하고 있지만 이번에 서울 大에 들어간 맏아들을 비롯하여 슬하의 3남매는 현재까지 그림 쪽으로는 관심을 가지지 않고 있다. 무엇 때문인가, 아버지의 작업이 너무 힘들다는 것을 보았기 때문인가.

이번 네 번째 갖는 그의 개인전에 많은 기대와 격려가 있길 바란다. 내가 文化部長으로 재직중 그를 위한 지면에 크게 인식했던 것이 그에게는 차라리 나의 참다운 우정으로 받아들여졌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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