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7    업데이트: 24-03-19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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风斋论书
관리자 | 조회 1,288

风斋论书  

 

황돈 선생

 

2006년 한국 월간지 '서예문화'에 중국의 서예가를 활발히 소개한 적이 있다.

석사를 마치면서 2006년초에 황돈선생님을 찾아 뵌 적이 있었다.

2005년에는 남경에 직접 찾아가 만나뵈었고,

2006년에는 선생님이 산동으로 오셔서 찾아뵈었다.

처음 이 분을 알게 된 것은 대학교 4학년때 진로 고민을 할 때였다.

모암 윤양희 선생님께서 중국에 서예가 중 가르침을 받을 만한 분으로 소개해주셨다.

그때는 인연이 닿지 않았나 보다. 산동에서도 좋은 선생님을 많이 만났다.

그 중 전각을 지도해 주신 범정홍 선생님을 잊을 수 없다.

범정홍 선생님께 전각을 배울 때 황돈 선생님의 이름을 다시 한번 더 듣게 되었다. 

 

묵연   황돈작품

 

나로서는 먹의 인연이 참 깊은 분이시다.

바로 이 전각이 황돈 선생님의 작품이다. 범정홍 선생님께 전각을 배울 때

이 작품을 보여주시면서 작품을 할 때 전통적 근거를 찾아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청자기 밑면에 쓰여진 글씨들에서 힌트를 얻은 작품이라고 하셨다.

변 밖으로 동글 동글 물방울 맺힌 느낌이 매력적이었다.

그 부분이 바로 청자기에 써서 나온 것이란다.

인연 연자의 세로획들의 수필들의 방울이 맺힌 듯한 느낌들..

한 때 따라해 보려고 노력 했지만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첩 연구로 유명한 서예가 황돈의 행서

 

산동예술대에서 석사연구생 졸업한 후 원래 남경으로 가서

황돈 선생님께 행서와 전각을 배우려고 했었다.

한국의 서예가 황동규 선생님과 친분이 있고 한국과 교류를 많이 하셨다.

그래서 인지 한국유학생들이 많이 찾아가서 배우려고 했던 것 같다.

직접 찾아뵙고 대화를 나눈 2006년이 아련하다.

한국의 상황을 잘 이해하시고 계셨고

유학생들의 중국어수준과 경제적인 여건을 중요하게 생각하셨다.

 

이런 남경 황돈선생과의 인연으로 인해 서예주간지 서법보에서 황돈선생님의

말씀들은 너무나 가슴깊이 와 닿았고 한국의 서예인들과 나누고 싶었다.

 

2009년 12월 <書法報>라는 중국 서예주간지에서 선생님을 만나보았다.

주간지 한면에 소개된 <풍재논서> 중의 글을 번역해 본다.

 

민승준

출처 http://blog.daum.net/ttugi77

 

 

 

黄 惇

황돈
남경예술학원교수   박사지도교수   남경예술학원예술학연구소  소장
서령인사이사   중국서협이사  중국서협학술위원회부주임   1947년생

 

 

선생님의 서예관은 무엇인지요?

 

나의 서예관에 있어서 제일 우선시 되는 것은

바로 ‘청나라인을 초월해야 한다’ 는 것이다.

청나라인들이 덮어 가리고 있던 것을 깨트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서예관의 엇갈림은 바로 ‘비학과 첩학의 다름’ 에 있다.

비학은 청나라중기 이후 차츰차츰 형성되어진 서예관념이다.

우리가 오늘날 듣고 있는 서예 관념들은 많거나 적거나 모두 다

청나라 비학에 물들어졌다.  사실 오염되었다는 것이 옳을 것이다.

 비학파는 본래 성공하길 간절히 원했다.

그들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관념과 기법상으로 형성되어진

안정된 체계를 갖추어서 첩학이 가지고 있던 지위를 깨트리는 것이었다.

 


중봉에 대한 선생님의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심윤묵 선생은 ‘笔笔中锋论필필중봉론’을 말한 바 있다.

하지만 서성 왕희지의 묵적본(모본) 을 꺼내서 분석해 보기만 하면

왕희지는 본래 용필할 때마다 중봉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사실 ‘필필중봉론’의 근원이 전서에 있다.

즉 가장 원시적인 용필형태이다.

 어떤 이들은 심윤묵 선생은 용필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고 할 지 모른다.

내 생각엔 그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고 본다.

 부득이 그렇게 말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리라.

그가 이해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비학파들이 가장 강조하는 필법인

중봉을 강조하지 않고서는 그 당시에 살아남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이는 관념상의 충돌이다.


탁월한 인쇄술이 등장하게 된 후 무수한 고대의 은밀한 법서들이

이제는 더 이상 비밀스럽지 않게 되었다.

우리가 어렸을 때 볼래야 볼 수 없었던 묵적들이 이젠 쉽게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우수한 묵적본들이 대량으로 출판되면서

일찌기 청나라 비학파들로 부터 공격을 받던 흠집들이 모두 보수되어졌다.

 즉 번각을 거치게 되어 진적과 거리가 멀어졌다는 첩학의 흠이 더이상 거론될 수 없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비학파들이 첩학파를 공격하던 이론적 기초가 붕괴된 것이다.

 

특히 행초에서 뭉텅한 붓으로 느리게 쓴 글자가 있다면

당나라인들은 아마도 비웃을 것이다.

하지만 청나라 시대땐 그런 모습이 보였고,

오늘날의 어떤 사람의 이러한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

나는 자주 나 스스로에게 묻곤 한다.

사람들은 가난한 농촌자녀들의 순수한 얼굴을 좋아하는데,

같은 심미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어찌해서 길거리에 써 붙은

 ‘补胎(빵구 때우이소)’

라는 순진하고 투박한 두 글자는 좋아하지 않는 것일까?
补胎 페인트 붓으로 툭툭 찍어 내려가며 쓴 듯한 어눌한 글씨로 중국 길거리에 자주 보인다

 

청나라인들은 그림 위에 경계를 지어 글씨쓰길 좋아했다.

 만약 晋나라인들이 보았다면 주판알처럼 포치한 걸로 보지 않았을까?

역사적으로 보면 어떠한 시대든지 서법관이든 심미관이든

 모두 다 일정한 정도의 이전 왕조의 제약을 받았다.

 당나라 초기에는 육조시대의 영향을 송나라때는 당나라의 제약을 받았듯이 말이다.

 

요즘 아이들을 교육할 때 대부분 안진경의 해서를 입문한다.

중국역사상 아주 많은 우수한 해서 법첩들이 있는데 왜 하필 안진경 해서에만 목숨을 걸고 있는가?

어린이 서예교육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은 한번 돌이켜 생각해 보아야만 할 것이다.

찬룡안비


20년전 어떤 학생이 북위해서인 찬룡안비를 행서로 쓴 적이 있었다.

난 그 학생한테 붓을 가져오게 하여 직접 써 보여줬다.

"아주 쉽지 않나!

 전예필법으로 결자의 특징만 더하면 되는 것 아닌가?"

좀더 깨우쳐 주기 위해, 다시 말했다.

"찬룡안비는 역사상 보여지는 진정한 행서와는 같은 것이 아니라네."

기법상으로 볼 때,  碑비를 씀에 있어서 篆隶전예의 필법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어려운 부분을 과장되게 억지로 표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연구해야 할 것은 표현에 있어서의 그런 고민들이 아니라

청나라인들이 관념상 후세에게 물려준 제약들로부터 어떻게 하면 벗어나느냐이다.

 더 나아가  창의적으로 서예를 발전시킬 수 있는 궤도 위에

그러한 제약들을 회복시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

 
청나라 초기 왕탁 유파 이후 초서의 업적은 유일무이 해졌다.

그렇지 않고서야 강유위가 "초서가 이미 끊어져 버렸다" 고 말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강유위와 동시대의 어떤 한 사람은 비학파의 서법으로 초서를 쓰고자 했다.

근데 내 생각엔 그것은 다 실패작이라고 본다.

왜 그러냐 하면, 비에는 초서가 없기 때문이다.

비의 심미관념이 장중하고 엄숙한데 반면 초서의 심미관은 유동적인 까닭이다.

 

시대에 유행하는 서풍을 따른는 젊은 서예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임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先共性,后个性”이란 말이 있다.

대상을 교학할 때는 제일 우선 일반적인 규율과 법칙(공통성)을 해결하는 것이 중요하므로

일반적인 것을 우선 따르고 그 뒤에 개성을 추구해야 한다는 말이다.

어떤 이들은 현사회의 풍조나 유행에 대해 크게 걱정하며,

청년서예가들이 가급적이면 유행을 쫓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그렇게 골치아파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청년들이 기초를 아주 잘 다지고 법칙과 규율에 통달하기만 한다면

 그들에게 유행을 쫓게 시켜도 그들은 따라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共性 = 공통성 : 서로 다른 사물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성질

 

옛부터 순수하며 진정한 그리고 조금의 변화도 허락치않는 중봉은 존재하지 않았다.

청나라 이후에 필법에 관한 일종의 신비하고 현묘한 설법들이 등장했을 뿐이다.

우리는 반드시 그런 것들을 깨트려버려야 한다.

 

절대 청나라 인들이 연역한 후에 얻은 관점을 가지고 고대작품상의 용필을 판단해서는 안된다.

청나라인들은 관념과 기법상에서 그 이전시대와는 다른 커다란 차이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용필의 특징을 강조하거나 첩을 선택하는 이념상에서 용필을 강조해야만

 비로서 정확한 비와 첩을 찾아내어 임서할 수 있는 올바른 입문과정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임서하는 자세에 대해 말하자면,

우선 용필의 문제를 해결한 다음 결자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이러한 이념은 신속하게 실력을 향상시켜주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伪功力论”위공력론이란

 당대에 와서 생긴 것이 아니라 오래전 부터 존재해 왔던 것이다.

그 예로 왕희지를 들 수 있다. 보편적으로 널리 알려진 왕희지는

 아들 왕헌지 몸 뒤에서 왕헌지의 붓을 뽑았다.

그런데 붓이 뽑혀지지 않았다.

후에 사람들은 이를 근거로 집필의 공력을 논할 때 이 일화를 인용한 것이다.

위공력은 많은 사람들에게 기본적으로 깔려있다.

그래서 종종 어떠한 현상에 대해 이해함에 있어 편견을 고집 하는 문제를 유발한다.

사생할 때 화선지의 공력이 좌지우지한다고 생각하거나

부드러운 장봉이 다양한 변화를 낼수 있다고 해서 심지어 어떤 이들은

 이 붓을 쓰지 않으면 일가를 이룰 수 없다고 여긴다.

이런 헛된 공력에 대한 이야기는 발명처럼 새로운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계속 순조롭게 이어져 내려가기만 할뿐 꺾어버리기가 아주 힘든 이상한 논리이다.

어떤 서예가가 학생에게 전서를 지도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 획은 내가 60평생 그었다. 이 획 하나에 내 공력이 다 있는 것이다.”

사실 이 말은 다른 사람을 속이는 말이다.

 

비 보다 첩을 중요하게 생각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고대의 법첩은 대체로 두 종류로 나뉘어 진다.

하나는 공통성이 강하나, 개성이 약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공통성이 약하나, 개성이 강한 것이다.

 이에 따라 첩을 배우는 방법도 두 가지로 나누어 진다.

먼저 공통성을 추구하는 방법과 뒤에 개성을 추구하는 방법이다.

共性공통성이란 일반적인 규율을 가리키는 말로 좀더 광범위하게 보면 '通用型통용형'에 포함된다.

个性개성이란 특수한 규율을 가리키는 말로 넓은 의미로는 '专用型전용형'에 속한다.

서예를 배우는 처음 단계에서는

공통성이 강한 통용형을 본보기로 삼아 먼저 공통성을 추구해야 한다.

붓을 다루는 능력이 잘 갖추어진 다음에는

각자의 상황에 맞는 개성이 있는 경전(전통적 권위를 가진 작품)을 선별하여 공부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뒤에 개성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共性 = 공통성 : 서로 다른 사물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성질, 보편성
널리 알려져 있다. 광범위하다. 통용 : 보편적으로 사용된다.

 

 

교학과정중에 어떤 서체의 비첩을 선택함에 있어서,

나는 두 가지 중요한 요소를 발견하였다.

하나는 기묘함을 찾기보다는 바름을 구해야 하는 것이다.

어찌해서 바른 것을 추구해야 할까?

 먼저 자형이 바르고 용필이 정확하며 대표성이 있거나 경전으로 볼 수 있는 것,

다른 첩까지 추론하여 알 수 있는 방통성을 갖춘 것을 선택하는 것이 좋다.

<石门颂석문송>, <杨淮表记양해표기>등이 이 부류에 속하는 법첩이다.

다른 하나는 글자 수가 많은 것을 구해야 한다.

<兰亭序난정서>와 <集字圣教序집자성교서> 둘을 비교해 보자면 전자가 글자 수가 적다.

하지만 <奉橘贴봉귤첩>, <孔侍中贴공시중첩>의 글자와 비교해 보면

<난정서>의 글씨는 많아도 아주 많다.

이삼십 자의 글자로 된 글자수가 적은 첩은 어떤 통하는 느낌을 얻기에 문제가 따른다.

중요한 것은 바른 것과 글자수이지만,

위에서 설명한 것들 중 가장 중요한 요소를 두 가지 꼽는다면

 바로 ‘필법의 정확성’과 ‘旁通性방통성’이다.
旁通 

어떤 사물에 관한 지식을 섭렵하게 되어 그와 유사한 사물까지 추론하여 알다.

 

어떤 학생은 나에게 묻곤 한다.

“어떤 첩은 개성이 없어서 임모하기 쉬워 쓸 맛이 안 납니다. 왜 그런가요?”

서예학습 과정중에 우리들은 자주 필법의 일반적인 규율을 홀시해 버린다.

그리고는 지나치게 글자형태의 아름다움에만 빠져들게 된다.

형에 대한 감각기관인 우리들의 눈은 형태에 대해서 매우 자극적으로 반응하기 때문이다.

 만약 올바르게 贴첩을 선택하는 원칙을 세울 수 있다면

각종 서체를 익힐 때 그 원칙에 커버를 씌우기만 하면 된다.

덮개만 완성된다면 바로 이것이 아주 훌륭한 체본이 되는 것이다.
范本 범본(範本) : 본보기가 될 수 있는 冊子  주로 서화(書畫)를 가리킴 

    临摹范本 = 체본

 

 

첩은 어떻게 읽어야 합니까?

 

독첩(첩을 읽는 것)은 거시적, 미시적 두가지 방법으로 귀납된다.

거시적인 방면은 시대정신, 풍격, 유파등을 포함한다.

이 방법으로 독첩하면 첩속에서 정보를 읽을 수 있고,

한 서예가가 법으로 삼았던 것을 투시해 볼 수 있으며, 그 당시 시대의 역사도 읽을 수도 있다.

우리가 임서함에 있어서는 닮았는지 안 닮았는지에 대한 문제가 기본적으로 한정되어진다.

이는 당연히 아주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늘상 자신의 시각을 측량수단으로 해서 평가 내려버린다.

표상의 물건들은 항상 먼저 사람을 사로잡기 때문에

글씨를 모사할 때 우리는 먼저 형에 마음을 다 빼앗겨 버리게 되는 것이다.

미시적인 방면은 필법을 보는 것이다.

 필법에서 부터 더 나아가 어떤 붓을 사용 하는가하는 문제에서 부터

 속도, 동작, 붓과 종이의 마찰, 붓에 먹을 적실 때의 정도 문제까지 첩을 읽을 때 보아내야 한다.

특히 좋은 화질로 인쇄된 첩일경우 더욱 그러하다.

원작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常观

 거시적인 것과 미시적인 것의 중간.   

 表象

본을 받을 만한 대상.  ‘본보기’로 순화  

 대표로 삼을 만큼 상징적인 것    표상=心象    표상주의 = 상징주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쇼펜하우어

 http://cafe.daum.net/wjsrkr7/HzvZ/78

 

 

필법의 개념은 글씨를 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법문제이다.

결자 역시 기법이다. 포백은 작품 속에서 읽어낼 수 있는 것으로 중요한 원칙이다.

 분명 감추고 있는 힘은 거대하다. 황정견의 첩을 읽고 있자면

 붓을 낮게 잡은 것이 아니라 높게 잡았음을 알 수 있다.

왜냐면 오직 높게 붓을 잡는 집필법에서만

 ‘一波三折일파삼절’이라는 진동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첩을 읽어내는 능력에서 여러분들은 역대로 거짓 인물을 만들어 왔던 사실이나

감정가들이 암호를 해독했던 방법에 관심을 가질 수 있다.

우리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해하고 난 후에 나쁜 일을 하라는 말은 절대 아니다.

 

나는 빼끼는 연습을 유일한 목적으로 삼는 임모를 반대한다.

임서를 했으면 버려야 한다.

자신이 임서를 얼마나 많이 했는지를 계산하거나

 몇 년동안 임서했느냐를 근거로 평가하는 것은 사실 그리 실질적 의의가 없다고 생각한다.

깊이 있게 탐구함이 없이 수백번 임모하는 것은

전심전력으로 첩을 읽거나 눈을 감고 마음 속으로 한번 써 보는 것만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첩을 임서한다는 것은

매번 높은 수준의 사고가 요구되는 심오한 작업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