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胡楊林의 漸悟
관리자 | 조회 391

胡楊林의 漸悟

 

 

与其跟着时下一些风潮乱追,倒不如在前辈开辟的大道上去延伸、发展。

这是一条“渐悟”的路子,只要坚持不断地修炼,总会有修成正果的一天。

 

시류에 따라 시대의 풍조를 어지러이 쫓는 것은

앞사람들이 개척해 놓은 대도상의 길을 확대하여 발전시켜 나가는 것만 못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漸悟 ”의 길이니, 끊임없이 수련을 견디어내기만 한다면

반드시 바른 결과를 가져올 날이 있을 것이다.

 

 

 
http://www.shxw.com/zhuanke/2008/0627/article_124.html

 

운정 박경자 선생님의 글입니다.


2006년부터 국제서법연합회 대구 경북지회와 중국 신강서법가 협회와 교류전이 있었다.
양 단체는 현재 3차례의 내왕과 교류전을 하였다.

나 역시 사무차장으로 어느정도의 통역실력을 갖추고 교류전에 적극 참여하였다.
  신강 작가 중 쿠얼러에 거주하는 장홍림

 금년 2008년 대구에서 개최하는 교류전에 참여하기 위해 귀국하였고,

나의 이름을 새긴 인장을 선물하여 주어 너무나 감사하고 소중하였다.

그래서 중국 인터넷망에서 그에 대해 검색을 해 보니

 "張鴻林과 그의 전각" 이란 글이 등재되어 있어 반갑게 읽어보고 느낀 바 있어,

어설프나마 번역을 하여 여기 실어본다.

서예와 전각에 관심있는 분이 계시다면 가볍게 한 번 읽기를 바란다.

한 사람의 소중한 작가가 탄생하기까지는 한 사람의 각고의 노력이 쌓여 있을 진 대

 현재 쉽게 타인의 글에 대한 낮은 평가를 하는 만연된 분위기를 가슴 아파하며 작가로써 삼가했으면 한다. 그래서 원문과 함께 번역글을 올린다.
 
                                    번역에 다소  잘못된 점이 있으면 지도를 바랍니다.
 
                                                                 국제서법연합회 대구 경북지회 사무차장
                                                                                       운정 박경자
 

 

 

大漠里的胡楊林——張鴻林和他的篆刻

대 사막의 호양나무 숲 -- 張鴻林 과 그의 전각


2008-06-27 10:58:14 

作者:刘绍刚 

 来源:互联网 

 

글쓴이 : 濼源 劉紹剛

1958년 산동 제남 출생. 1982년 산동대학 역사과 졸업,

그 후 문자와 서법, 전각 전공, 1989년 문학석사학위 취득, 현 중국문물연구소 근무

 

번역 : 雲亭 朴敬子

 1960년 경북 영천 출생. 경북대학교 중어중문학과 중국고전문학 석사학위 취득,

현 운정서예학원 운영

 

 


     我认识张鸿林是在1984年,那时我刚刚获得了全国首届篆刻征稿评比的一等奖,一时间

爱好者求教的信件纷纷涌来,堆满了案头。我只能从中选择基础较好且风格相近的印拓给予点评。

 

내가 장홍림을 알게 된 연도는 1984 년, 그 당시 나는 막 전국 제1회 전각정고평비 대회에서 1등 상을

획득했을 때였고, 애호가들이 한꺼번에 가르침을 받기를 청해서 계속해서 우편물을 보내오니 ,

책상 위에 가득 쌓이게 되었다. 나는 단지 그 가운데 기초가 비교적 좋고

 또한 풍격이 서로 비슷한 印拓들을 선택해서 평을 해 주었다.

 

其中有一封从新疆寄来的印拓,有临摹乔大壮先生的“协和万邦”、“光明海”印,

有临摹我刻的“猛志固常在”印。可谓惟妙惟肖。

我把这件印拓拿给业师蒋维崧先生看,蒋老仔细端详了许久,啧啧称奇。

 

 그 가운데 新疆에서 붙여온 한 통의 印拓이 있었는데,

喬大壯 선생의 “協和萬邦 ”과 “光明海 ”印을 임모 한 것과

내가 각을 한 “猛志固常在 ”印을 임모 한 것이 있었다. 임모한 刻은 거의 진품과 흡사하다고 이를 만 했다.

나는 이 印拓을 스승이신 蒋維崧선생에게 보여 드렸더니,

蒋선생님께서는 자세히 오랫동안 들여다 보시더니 극찬을 해 주셨다.

 

说简直可以乱真,

并嘱咐我应该很好指导,这便是张鸿林寄来的印拓。

 

  그야말로 거의 진품과 혼동할 지경이라 말하시며,

또한 내게 잘 지도해 주기를 부탁하셨으니, 이것이 바로 장홍림이 붙여온 印拓이었다.

 

那时候鸿林还在南疆的若羌县二中当中学老师,

从他寄来的照片看,炯炯有神的双眼,高高的鼻梁,

嘴上还留了两撇小胡子,活托一个新疆少数民族的小伙子。

后来我才知道,鸿林居然是我的老乡,他父亲原是济南人,

20世纪50年代支边才去的新疆,真是一方水土养一方人!

从那以后,鸿林每隔一段时间就寄几方印拓来,让我评点。

 

 

 

그 당시 장홍림은 아직 南疆의 若羌縣 二中에서 중학교 교사를 할 때였고,

 

그가 붙여온 사진 속의 얼굴을 보니, 눈은 번쩍이고 기백이 넘쳤으며, 우뚝한 콧날,

입술 위 팔자로 난 작은 수염, 신강 소수민족의 한 젊은이로 활기차 보였다.

뒤에 나는 비로소 알게 되었는데 홍림은 뜻밖에 나의 고향 사람이며,

그의 부친은 원래 濟南사람으로 20세기 50 년대에 변경지방의 개발, 건설을 지원하기 위해

신강으로 가게 되었으니, 참으로 그 지방의 풍토는 그 사람을 길러서 모습조차 변화시키는 것 같았다.

그로부터 홍림은 매번 일정한 간격을 두고 印拓을 붙여왔고, 나는 평가하고 지도를 하게 되었다.

 

就这样过了一年多,有一天我突然接到一个电话,是鸿林打来的,他告诉我已经到北京了!

从若羌县到北京,坐汽车,倒火车,足足花了五天的时间!

这真是让我十分感动,我从内心深处佩服他对篆刻的热爱和执著。

 

이렇게 1년 이상을 배우다가 하루는 나에게 갑자기 홍림이 벌써 북경에 도착했노라고 전화가 왔다.

若羌縣에서 북경에 이르기까지, 자동차를 타고 기차를 갈아타면서, 꼬박 5일간의 시간이 걸렸다니!

정말 나는 크게 감동 되었으며 , 마음속 깊이 그의 전각에 대한 열정과 집착에 탄복을 하게 되었다.

 

 

 

 

于是我就把手头时常翻阅的《乔大壮印蜕》送给他,

——这是我从连劭明那里借来复印装订的惟一一

本乔先生的印存,也是我当时能找到的最好的一件礼物。

 

이에 나는 평소에 애지중지하며 펼쳐보던 “喬大壯印 蜕”를 그에게 주었다.

이것은 내가 連劭明에서 빌려와서 복사, 제본한 유일한

 喬선생의 印存으로,  당시 나를 찾아온 것에 대한 가장 좋은 선물인 셈이었다.

 

    1986年9月,我考上蒋维崧先生指导的研究生,

也许是我的疏懒,渐渐的就与鸿林失去了联系。

不过每次看全国的篆刻展和篆刻的一些作品集,

我都会看看新疆的作品,看看有没有鸿林的作品,结果每次都能看到鸿林的新作。

 

 

1986년 9월, 나는 蒋維崧선생이 지도하는 연구생으로 합격되었는데,

아마도 나의 태만으로 인해 점점 홍림과의 연락이 끊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매번 전국의 전각전과 전각의 작품집에서,

나는 늘 신강의 작품을 볼 때는 홍림의 작품이 있는지를 살펴보았는데,

결과 매번 모두 홍림의 신작을 볼 수 있었다.

 

看到鸿林的篆刻,我感到一种说不出的亲切,

看着鸿林的篆刻一天天成熟,我感到由衷地高兴。

后来才知道,鸿林1989年已经离开了中学,到库尔勒市人民法院做了一名法官。

 

 홍림의 전각을 보면서 말할 수 없는 절친함을 느꼈으며,

홍림의 전각은 날마다 성숙되어감을 볼 수 있어, 나는 마음속 깊이 기쁨을 느꼈다.

후에 비로소 알게 되었는데, 홍림은 1989년 이미 중학교 교사를 그만두고,

庫尔勒시 인민법원에 법관이 되어 있었다.

 

2000年,鸿林又一次来内地,不过这次我们是在济南见的面,

这时的鸿林已经是库尔勒法院的副院长了。

在济南,鸿林拜见了他仰慕已久的前辈——蒋维崧先生。

 

2000년, 홍림은 또 한번 內地로 왔으나, 우리들은 제남에서 비로소 서로 만나게 되었으니,

이때 홍림은 이미 庫尔勒법원의 부원장이 되어 있었다.

제남에서 홍림은 그가 오랫동안 흠모해 오던 선배 蒋維崧선생을 만나 뵙게 되었다.

 

蒋老对鸿林的篆刻予以悉心指导,

并为鸿林题写了“鸿林印存”、“张鸿林书法篆刻展”,

蒋老为鸿林写的一幅金文条幅很有意思,“静听松风寒”。

我觉得不能仅仅把它看作是一幅书法作品,

其中也深含了蒋老对鸿林这些年来一直坚持治印,

一直学习乔派印章风格的褒奖与肯定。

 

 

 

 蒋선생은 홍림의 전각에 대하여 마음을 다해 지도해 주었고,

 

아울려 홍림을 위하여 표제에 “鴻林印存 ”과 “장홍림서법전각전 ”을 써 주었고,

장선생이 직접 쓴 한 폭의 금문족자 “靜聽松風寒”의 뜻이 깊은 글을 써 주었다.

고요히 소나무의 찬바람 소리를 듣는다

나는 단지 그것은 한 폭의 서법작품으로써 뿐 만 아니라,

 그 가운데 또한 장선생의 홍림이 몇 년 동안 전각작품에 힘써 온 것에 대하여,

또 줄곧 喬派印章의 풍격을 학습해 온 것에 대하여 장려하고 인정하는 뜻이 숨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鸿林对艺术是执著的。

他在若羌二中当老师时,地处偏远之地,沙海之中,加上条件艰苦,

他只能在教学之余,就着木床板写字、刻印,要想找到一本碑帖、印谱,

都要托朋友去买,或者到出版社邮购。

就是在这么艰苦的条件下,鸿林没有放弃。

 

 홍림은 예술에 대하여 집념이 있었다.

그는 약강현 제 2 중학교의 교사시절, 궁벽한 벽지인, 사막의 한 가운데라는 힘들고 어려운 조건 속에서

 다만 敎學의 남은 여유를 木床板에 붙어 앉아 글 쓰고, 도장 새기며, 비첩과 인보를 찾고 싶을 때면

 오직 친구에게 부탁하여 구입을 하거나, 혹은 출판사의 통신 구매를 이용해야만 했다.

이러한 간고의 조건 아래서도, 홍림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到了法院以后,每天除了繁忙的公务以外,

还要有多少应酬也是可以想像的。

但是鸿林能推掉所有不必要的应酬,回到家里静下心来

写字、治印,这一点,并不是什么人都能做得到的。

没有一点对艺术的执著精神,恐怕很难坚持下来。

 

법원에 들어간 이후에는 매일 번거롭고 바쁜 공무를 제외하고도,

또 접대를 해야만 할 일이 많았음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홍림은 불필요한 접대를 다 버리고, 집에 돌아와 고요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글자를 쓰고, 도장을 새긴 이러한 일면들은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이다.

예술에 대한 집념의 정신이 없다면, 아마도 매우 견지하기 어려운 일일 것이다.

 

    古人云:“少则得,多则惑”,

看了鸿林刻的图章,我对这句话有了更深刻的理解。

他以乔派印章为基础,掺以黄牧甫、赵之谦,直追秦汉,

我也是沿着这条路走过来的。

 

옛 사람이 이르기를 : “적으면 곧 얻지만, 많으면 곧 의혹된다 ”고 했으니,

홍림의 도장에서 나는 이 글귀에 대하여 더욱 깊은 이해를 포괄하고 있음을 보았다.

그는 喬派印章의 기초를 쌓고, 黃牧甫 와 趙之謙 을 익히고, 곧 바로 秦漢 을 추구하였으니,

나 또한 이러한 길을 따라 걸어 왔던 것이다.

 

感觉到在这条路上,有很多可以发展的空间和发挥的余地。

这几年很多人都在思索篆刻的创新和发展问题,

随着出土文献的大量增加, 人们对简牍帛书、陶文玺印的研究和认识都较前人有了很大的提高。

人们对古文字认识的数量也大大超越了前代。

 

 

 

이러한 길 위에서 많은 발전의 공간과 발휘할 수 있는 여지가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최근 몇 년 동안 많은 사람들이 모두 전각의 창신과 발전문제를 생각하면서,

출토문헌이 대량으로 늘어남에 따라 사람들은 簡牘이나 帛書,

陶文과 玺印에 대한 연구와 인식 모두 비교적 前人들에 비해서 크게 향상되었다.

사람들의 고문자에 대한 인지도 역시 앞 시대에 크게 앞서는 수준이 되었다.

 

篆刻家们在“印外求印”的路上有了更多可以参考的资料。

但是,“印外求印”并不是简单地把简帛书或其他载体上的文字照搬到印章上去,

而是要经过篆刻家们别具匠心的改造,以使之适应印章的形式,同时也可以使印章更加丰富。

我也曾经作过一些尝试,但反回头来看鸿林的印章,

虽然没有揉进那么多东西,却也有一种纯净的美,

这便应了“少则得,多则惑”这句话。

 

전각가들은 “印外求印 ”의 길에서 참고할 만한 자료가 더욱 많이 있었다.

그러나, “印外求印 ”이란 결코 간단하게 簡帛書 혹은 기타 다른재료상의 문자를 답습해서

 印章에 그대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전각가들이 별도로 고안하고 다시 개조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것은 印章의 형식에 맞아야 하며 동시에 또한 印章에 풍부함을 더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일찍이 여러 번 시행해 본 적이 있었으나, 오히려 장홍림의 인장을 돌아보면

비록 많은 것들을 뒤적여 주무르진 않았지만, 오히려 일종의 순수함을 지닌 아름다움이 있으니,

이것이 곧 “적으면 얻지만, 많으면 의혹된다 ”는 이 구절과 어울린다고 하겠다.

 

    有人说鸿林的印章没有多少创新,我不否认这种说法。

创新固然可贵,但创新并不是每个篆刻家都能做到的。

从篆刻史上看,一个时代能有一两个篆刻家创出一点新来就不容易了。

 

어떤 작가는 홍림의 인장에는 創新이 없다고 말하지만, 나는 이러한 견해를 인정할 수 없다.

創新은 진실로 귀한 것이지만, 創新은 결코 전각가들이 모두 이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전각 역사상에서, 한 시대에 한 두 전각가만이 약간의 새로운 창작을 보았을 뿐이니 참 어려운 일이다.  

 

看看浙派就有西泠八家,丁敬之下的七人都在沿着一条路走,不也能跻身大家之列吗?

何况一个篆刻流派的形成,往往需要几代人的发展与完善,而不是一两个大家的绝响。

与其跟着时下一些风潮乱追,倒不如在前辈开辟的大道上去延伸、发展。

这是一条“渐悟”的路子,只要坚持不断地修炼,总会有修成正果的一天。

 

 절파의 서령8가를 보자. 丁敬 아래의 7인이 모두 같은 길을 따라 걸어왔으니,

대가의 반열에 들어갔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물며 하나의 전각유파의 형성이란 종종 몇 대에 걸친 사람의 발전과 완벽함을 필요로 하는 것이지,

한 두명 대가의 맥이 끊어진 기예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시류에 따라 시대의 풍조를 어지러이 쫓기 보다는 오히려

앞사람들이 개척해 놓은 대도상의 길을 확대시키고 발전시키는 것이 더 낫다.

이것은 “漸悟 ”의 길이니, 오직 부단히 수련을 견지하기만 하면

바른 결과를 볼 날이 있는 것이다.

 修成正果 : 수행하여 성과를 얻다. 수련으로 깨달음을 얻다.

 

    鸿林的印章也有自己的新意,

每个篆刻家的创作,都会把自己对篆刻的理解反映到作品中去,

即使想模仿,也很难做到跟所模仿的对象一模一样。

刻意求新求变者自不必多言,

印史上的摹印一派,其实也各有特色,

明眼人一看便可以分辨出来。

 

홍림의 印章 또한 자신의 創新이 있으며,

모든 전각가의 창작은 모두 자기 자신이 전각에 대해서 이해하는 것을 작품 속에 반영하고 있는 것이니,

곧 설령 모방을 생각했다고 해도 또한 모방의 대상과 똑같이 따라 하기는 어렵다.

뜻을 새기고 새로운 것을 구하고 변화를 추구하는 것은 많은 말이 필요한 것은 아니니,

印史상의 印을 모방하는 일파도 사실은 각자의 특색이 있는 것이니,

 밝은 눈을 가진 사람이 본다면 바로 분별해 낼 수 있는 것이다.

 

像鸿林所刻的“寿无疆”(图1),布局的开合已与壮翁有明显不同;

“仁则寿”(图2)一印又糅合了陈巨来的线条,

而“润物细无声”(图3)又将壮翁与蒋老的风格成功的结合到一起,

布局得体大方,“细”字所形成的空白与“声”字下方的空白互相呼应,

“无”字既与“声”字有穿插,又与“物”字紧紧相连,

疏密设计颇见巧思。

 

 

홍림이 刻한 “夀無疆 ”(도1)은, 구성의 開合이 이미 壯선생과 분명히 같지 않으며;

“仁則夀 ”(도2)의 도장은 또한 크게 포치를 두어 선을 혼합하였으며,

“潤物細無聲 ”(도 3) 또한 壯선생과 蒋선생의 풍격을 성공적으로 함께 결합하고 있으니,

배열이 체를 얻음이 대범하며, “細”자를 형성한 공백과 “聲”자 아래 공백이 서로 호응하며,

“無”자는 이미 “聲”자와 穿揷(교차) 하고, 또한 “物”자와도 긴밀하게 서로 이어져 있으며,

성기고 긴밀한 결구가 상당히 교묘하게 구상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当然了,要按更高的要求来衡量,

鸿林的印章还没有完全成熟,没能形成自己独到的面目。

但这也说明鸿林的印章还有很大的发展空间,

我相信以鸿林的执著精神,加上在书法篆刻上不断地努力,

学问、修养的不断增加,在篆刻艺术上一定会大有作为的。

 

당연히 더욱 높은 요구를 고려하여 살펴 볼 때에

 홍림의 인장은 아직 완전히 성숙된 것은 아니며, 자신의 독자적 성취를 이루어 내었다고는 할 수 없다.

다만 홍림의 인장은 여전히 많은 발전 공간이 있음을 설명한 것이니,

 나는 홍림의 각에 대한 집념의 정신은 서법 전각상에서 부단한 노력을 더하여,

이후 학문과 수양의 부단한 증진으로 전각예술상에서 반드시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2000年我到新疆去,鸿林陪我去塔克拉玛干大沙漠,

他指着一片树,告诉我说:

"这就是胡杨林,它千年不死,死后千年不倒,倒下后千年不腐。"

我被这种精神震撼了!"

 看看鸿林的篆刻,想想鸿林在艺术上执著的精神,

不正像沙漠上的那片胡杨林吗?

 

2000 년 나는 新疆 에 갔었고, 홍림이 나를 타클라마칸 사막에 데리고 갔었다.

 그는 한 나무를 가리키며 나에게 말하기를:

“이 나무는 胡楊林으로 천년 동안 죽지 않고, 죽은 후 천년 동안 넘어지지 않으며,

 넘어진 후에 천년 동안 썩지 않는다. ”

나는 이러한 정신에 크게 감동되었다!

홍림의 전각을 보거나, 홍림의 예술상의 집념의 정신을 생각해 보면,

바로 이 사막 위의 그 胡楊林을 닮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