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7    업데이트: 24-03-19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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非草書
관리자 | 조회 303

趙壹

《非草書》

 

赵壹(生卒年不详)字符叔,

主要事迹见于汉灵帝年间(168年一189 年),

为人耿直,狂傲不羁,受地方乡党所排斥,屡次得罪,

几乎被杀,经友人救援方免。

东汉汉郡西县人(今甘肃省礼县大堡子山东)。

 

조일은 태어나고 죽은 해가 명확하지 않다. 자는 부권이다.

그에 관한 주요한 기록은 한나라 영제 년간에 보여지므로

동한 영제 때의 인물로 추정된다.  

남에게 강직하고 오만하며 구속됨을 싫어하는 성품이었다.

속박받지 않고자 하는 성품 탓에 지방향당에 배척을 받았고

자주 죄를 얻어 거의 죽을 뻔 하였으나 벗의 구원을 받고 목숨을 건진다.

동한 한양군 서현사람이다.

(지금의 감숙성 예현 대보자산동)

 

《非草书》是东汉灵帝时辞赋赵壹所作的一篇赋文,历来对其褒贬不一,

要真正的理解《非草书》还应该从他所处时代的社会背景、

文化背景以及赵壹本人的性情和处世的态度,

将其还原到应有的历史背景之中去,

才能理解他当时写这篇赋的真正的动机和目的。

 

비초서는 동한영제때 사부가 인 조일이 지은 賦文,

역대로 이 문장에 대한 비평은 기리기도 하고 폄하하기도 해 한결같지 않다.

진정하게 비초서를 이해하기 위해 조일이 처해 있었던 시대배경

및 문화배경 그리고 조일 본인의 성정과 처세태도등을 잘 이해해야 한다.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 역사배경 한 가운데 놓여져야만

 비로서 그가 당시에 쓴 이 賦의 진정한 동기와 목적을 이해할 수 있다.

 

1. 사부(辭賦).

 중국 戰國時代에 기원을 두고 있는 고대의 문체(文體)

 漢나라 사람이 굴원(屈原) 등이 지은 부(賦)를 모아서 '초사(楚辭)'라 칭하여

후세 사람들이 부(賦) 형식의 문학 작품을 두고 '사부(辭賦)'라 하였다.

2. 賦文

詩經에서 이르는 시의 六義 가운데 하나.

사물이나 그에 대한 감상을, 비유를 쓰지 아니하고 직접 서술하는 작법이다.


对于《非草书》,

我们一般认为它是最早论及书法的对草书进行非议的一篇赋文,

文中对草书产生的渊源作了客观的、理性的分析,

对当时的习草之风之盛也作了生动形象的描述,

并对这一流行时风予以了尖锐的批评,

阐述了他对草书的认识和持有的态度。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비초서는

 최초의 서예이론인 동시에 초서에 대한 비난을 가한 賦文이다.

당시의 초서를 익히는 풍토는

외형의 모습을 생동감있게 묘술하는데에 치우쳐 있었다.

이런한 유행에 대해 날카로운 비평을 한 이가 바로 조일이다.

비초서는 조일의 초서에 대한 인식과 특유한 태도를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对后来的书法理论的形成与发展起了极大的推动作用。

后世对此篇的评价褒贬不一,以非议居多,

或认为赵壹缺乏书法艺术的素养,

根本不理解草书,更不应该对草书横加指责;

或认为他是切实的实用主义和功利主义者,否定了艺术的种种功用;

或以是篇的生动描述为据,而作为书法艺术自觉化的重要标志……。

 

후세의 서예이론의 형성과 발전에 커다란 추동작용을 불러 일으켰다.

후대의 이 이론에 대한 평가는 칭찬과 폄하가 하나같지 않다.

무조건 비난하는 것이 대부분이기도 하고,

혹은 조일이 서예예술의 소양이 부족하다고 여기기도 하며,

근본적으로 초서를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

 

초서에 대해 제멋대로 지적하도록 내버려두지 말았어야 했다고 비난한다.

혹은 조일을 확실한 실용주의 공리주의자로 여기고,

예술의 갖가지 효용을 부정했다고 비평한다.

또한 이 비초서의 생생한 묘술을 근거로

서예 예술자각화의 중요한 표지로 삼기도 한다.

 

此外,该文给予我们的一些信息,也是我们应该挖掘和做整体考察的。

 

여기서 우리는 이 문장이 우리에게 부여하는 정보를 놓쳐서는 안된다.

진정한 의미를 캐내고 총체적으로 고찰해내야 할 것이다.

 

 

 

-  원문  -

 

1

余郡士有梁孔達、姜孟潁者,皆當世之彦哲也,

然慕張生之草書過于希孔、顔焉。

孔達寫書以示孟潁,皆口誦其文,手楷其篇,無怠倦焉。

于是後學之徒競慕二賢,守令作篇,人撰一卷,以爲秘玩。

余懼其背經而趨俗,此非所以弘道興世也,又想羅、趙之所見

嗤沮,故爲說草書本末,以慰羅、趙,息梁、姜焉。

 

우리 군엔 양공달과 강맹영이라는 두명의 선비가 있다.

둘 다 모두 당대 어질고 현명한 인사였다.

그러나 그들은 장지의 초서를 지나치게 좋아함이

 공자와 안연, 앙모함을 넘어서는 정도였다.

공달은 맹영에게 편지를 써 알려주길 평소에 입으로는

그들의 문장을 외우고, 손으론 이를 모방함에 조금도 게으름이 없었다.

후학자들이 경쟁적으로 서로 이 두 어질고 재능있는 이들을 모방했다.

 

내가 걱정하는 바는 이런 사람들이

문장의 내용과 이치에 어긋나고, 세속에 따르는 것이다.

이는 정도를 발양해 국가를 흥성하게 하는 바가 아니다.

 

또 한편 羅暉와 趙襲가 조소받고 그들을 회의적으로 여기는 상황을 떠올리니

내가 초서의 시작과 끝을 이야기 함을 통해서 羅暉와 趙襲을 위로하고

梁孔達과 姜孟潁을 안정시키는 것을 계속 해내려가고 싶은 바이다!! 

 

2

竊覽有道張君所與朱使君書,稱正氣可以消邪,

人無其,妖不自作,誠可謂信道抱眞,知命樂天者也。

若夫褒杜、崔,沮羅、趙,忻忻有自臧之意者,無乃近于矜伎,

賤彼貴我哉!夫草書之興也,其于近古乎?

 

나는 사적인 자리에서 장지와 주사군이 나눈 서신을 보았다.

 그 正氣가 사악함을 없앨 수 있겠도다

정기 : 광명정대한 기풍, 풍조

의견이 맞지 않아 틀어질 이유가 없고,

사악함이 분란을 일으킬 여지를 주지 않는다.

대도를 믿고 따라 순수한 본성을 잘 유지하며,

편안히 운명의 본분을 지키고, 즐겁게 천도의 배정을 따라야 한다.

두도, 최원을 칭찬하고 라휘, 조습이 비웃음 거리가 되어

 서로의 미를 자화자찬하는 풍토를 면할 수 없다.

서예술로서 스스로 책임지니, 천함이 귀함을 대신할까 두려워 지노라.

초서의 발생은 지금으로 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고대가 아닌가?

장지가 라휘와 조습을 천하게 여기고 자기자신을 귀하다고 한 것을 가리킨다.

 

上非天象所垂,下非河洛所吐,中非聖人所造。

 

 

 

위로는 천상이 드리운 바가 아니며, 아래로는 하락이 내�은 바가 아니고,

중앙에는 성인이 만든 바가 아니다.

1. 천상 : 日月星辰을 가리킨다.

허신은 <설문해자서> 에서  "仰卽觀象于天"이라 하여 처음으로 <易>팔괘를 만들었다.

2.  하락 : 하는 황하이고 락은 락수이다.

한나라 공안국과 유흠의 해설에 따르면

 복희때 용같은 신비한 말이 황하에서 출현했다.

말등에 휘감겨 있는 털이 마치 星点같아 龍圖라 불리어 졌다.

 복희는 팔괘八卦를 그린 생기법으로 법을 취했다.

하나라 우가 治水할 때 락수에서 신비한 거북이 나왔다.

거북 등의 갈라진 문양이 마치 문자같았다.

우임금은 여기서 법을 취해 九疇구주를 만들었다.

<尙書. 洪範> , <書. 顧命>,  <漢書. 五行志上>

3. 성인 : 황제를 가리키는데 주나라 선왕을 의미한다.

창힐과 사주는 그들의 지시에 따라 문자를 만들었다고 하는 전설이다.

 

사주 : 한자의 옛 글자체이다. 주나라 선왕때의 태사太史인 주가 창작한 것이다.

소전의 전신으로서 보통 대전이라고 한다.

구주 : 《洪九疇
 传说在大禹治水之前,他的父亲也在治水,但是他的方法是处处挖土堵水,

上帝知道后震怒不已,因为他违反了五行之中水的特性,

大怒之下就没有给他《洪范九畴》,直到大禹出来治水采用处处疏通的方法,

顺应了水的特性,上帝便赐予他《洪范九畴》

전설에 하나라 우임금이 물을 다스리기 그 이전에

 그의 아버지도 물을 다스리는 일을 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그의 방법은 곳곳에 땅을 파 물의 흐름을 막았다.

옥황상제가 이를 알고 크게 분노했다.

오행중 물의 특성을 위반함으로 인해 상제는 그에게 홍범구주를 주지 않았다.

우임금이 물을 통하게 하는 치수 방법을 채택해 사용함에 이르러

물의 특성에 순응하는 모습을 본 상제는 우임금에 홍범구주를 부여했다.

이 홍범구주에 따라 성정을 배푼 우임금은 성군으로 유명해 진다.

 

홍범구주

天锡禹《洪范》九畴。

初一曰五行,次二曰敬用五事,次三曰农用八政,次四曰协用五纪,

次五曰建用皇极,次六日又用三德,次七日明用稽疑,

次八曰念用庶征,次九曰向用五福,威用六极。

《서경》의 홍범에 기록되어 있는, 우(禹)가 정한 정치 도덕의 아홉 원칙.

  오행五行,  오사五事,  팔정八政,  오기五紀,  황극皇極,

 삼덕三德,  계의稽疑,  서징庶徵,  오복五福,  육극六極

 

秦之末,刑峻网密,官書煩冗,戰攻幷作,軍書交馳,

羽檄紛飛,故爲隸草,趨急速耳,示簡易之指,非聖人之業也。

 

 진나라 말기는 가혹한 형벌과 법률이 분분해져 궁중문서들이 번잡해지고

 전쟁이 끊임없이 발생하여 군사문서들도 이리저리 내달리고

긴급한 군사문서도 날아다니던 시기였다.

그래서 예초가 만들어졌다. 긴급, 재촉, 신속할 뿐이었다.

즉 간략명료함을 나타낼 뿐이었지 결코 성인의 학업이 아니었다.

 

예초 : 예서를 말한다. 예서는 진나라 시기 빨리 쓰기 위해 만들어진 초서이다.

설문해자서 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진시황이 분서갱유를 일으켜 많은 고전들을 없앴다.

 정권을 지키기 위해 강력한 법제를 차용하고 또한 전쟁이 끊이지 않았으니

 병역및 여러 관직무가 나날이 번잡해져 예서라는 간편한 문자가 필요하게 된 것이다.

조일이 말한 진나라 말기의 예초는

 한나라 이후에야 비로서 나타난 장초와 초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但貴刪難省煩,損復爲單,務取易爲易知、非常儀也。

그저 어렵고 번잡한 것을 삭제, 생략하여 복잡함을 간략히 하여

간편하게 쓸수 있도록 했을 뿐이니 결코 정상적인 형체가 아니었다.

지나치게 외형에만 신경쓴 것이다.

 

故其讚曰:“臨事從宜。”

而今之學草書者,不思其簡易之旨,

直以爲杜、崔之法,龜龍所見也。

扶拄挃,詰屈犮乙,不可失也。

齔齒以上,苟任涉學,皆廢倉頡、史籒,竟以杜、崔爲楷;

私書相與之際,每書云:适迫遽,故不及草,草本易而速,

今反難而遲,失指多矣。

 

" 어떠한 상황에 부딪혀 적당한 수법을 취한 것이다. "

그러나 지금 초서를 배우는 사람들은

초서의 간이적인 본래의미를 고려하지 않고

두도, 최원의 초서를 법으로 여기니 영물스런 귀룡의 드러나는 바이다.

일어나고 떨어지는 필세, 수많은 변화가 있는 필획들을

절대 없어서는 안되는 중요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

어린아이에서 벗어나 막 학업을 시작한 이들이

 창힐과 사주를 버리고 두도와 최원을 모범으로 삼고 있으니

 벗에게 편지를 띄워 자주 이렇게 말한다.

"바로 막 긴박함에 놓였을 때, 초서를 사용하는 것만 못하다 "

초서의 본래 의미는 간편하고 빠르게 쓰는 것인데

지금은 도리어 어렵게 쓰고 재빠르지 않게 쓰고 있으니

초서의 본래의 뜻을 많이 잃어버렸다.

 

3

凡人各殊氣血,異筋骨。

心有疏密,手有巧拙,書之好醜,在心與手,可强爲哉?

若人顔有美惡,豈可學以相若耶?

昔西施心疹,捧胸而顰,衆愚效之,

只增其醜;趙女善舞,行步媚蠱,學者弗獲,失節匍匐。

夫杜、崔、張子,皆有超俗絶世之才,博學餘暇,游手于斯,

後世慕焉。專用爲務,鉆堅仰高,忘其疲勞,夕惕不息,

仄不暇食。十日一筆,月數丸墨。

領袖如皂,脣齒常黑,雖處衆座,不遑談戱,展指畫地,

以草劌壁,臂穿皮刮,指爪摧折,出血,獲不休輟。

견새:골이 들러나 보임, 새:고기 가운데의 뼈

 새 (角+思:외피매끄러울 새, 겉반드러울뿔 새)

然其爲字,無益于工拙,亦如效顰者之增醜,學步者之失節也。

且草書之人,蓋伎藝之細者耳。

鄕邑不以此較能,朝廷不以此科吏,博士不以此講試,

四科不以此求備,征聘不問此意,考績不課此字。

善旣不達于政,而拙無損于治,推斯言之,豈不細哉?

夫務內者必闕外,志小者必忽大。

俯而捫虱,不暇見天。

天地至大而不見者,方銳精于虮虱,乃不暇焉。

 

 사람들은 각기 다른 성정과 정력(정신과 체력)을 가지고 있다.

마음에는 높낮이가 손에는 교졸이 있다.

서예의 미와 추는 마음과 손에 달려 있으니 억지로 해서 될일인가?

사람의 얼굴에 미와 추가 있는 것처럼 어찌 배움에 서로 같음이 있을 수 있으리?

 

옛날 중국의 4대미녀중 하나인 西施서시가 마음이 아파 가슴을 잡고

눈살을 찌푸렸다. 이 모습이 아름다운 줄 알고 사람들도 이 모습을 따라했다.

서시를 따라 찡그린 이들은 그들의 추함을 더할 뿐이었다고 한다.

趙나라의 여인은 춤을 잘 추었는데 걸어가는 자태가 아름다웠다.  

그걸 배우려는 이들은 손동작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그래서 걸어가는 모습이 균형을 잃어 기어가는 것 같았다고 한다.

 

그럼 초서로 돌아오자.  두도, 최원, 장지 모두 비범하고 출중한 재학들이다.

그들은 박학의 여유러움으로 손에는 초서를 들고 있는데,

 후학들은 박학을 볼 줄 모르고, 그 형식만을 모방하고 있다.

하나에만 몰입하여. 자신의 피로도 잊고, 밤낮으로 음식도 걸러가며 연마한다.

붓 한자루는 10일 만에 닿아 없어지고 1달동안 수 여개의 먹을 소모하며,

옷소매와 입술은 항상 시커멓게 되었다.

 

4

策以此篇硏思銳精,豈若用之于彼聖經,稽歷協律,推步期程,

探賾鉤深, 幽讚神明。覽天地之心,推聖人之情。

析疑論之中,理俗儒之諍。依正道于邪說,儕《雅》樂于鄭聲,

興至德之和睦,宏大倫之玄淸。

窮可以守身遺名,達可以尊主致平,

以玆命世,永鑑後生,不亦淵乎?

 

 

 

 

趙壹의 미학 사상――서예미의 자각

 

- 배규하 -

 

동한(東漢)시대 서예가 창작과 감상의 심미적 예술로 자각되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또 하나의 중요한 저술은 조일(趙壹)의《비초서(非草書)》이다.

 

동한시대 서예는 실용적 효용성에서

심미적 가치를 중시하는 예술의 한 영역으로 발전하였다.

당시에 사용되던 여러 서체 가운데

순수한 창작 미학의 중심 위치에 자리잡고 있던 서체는 초서이다.

두도(杜度), 최원(崔瑗), 장지(張芝) 등은

초서의 창작에서 문자 부호로서의 의사 전달 단계를 탈피하여

자신들의 예술적 영감을 표현하여 감상 가치가 풍부한 작품을 창작하려 하였다.

다양한 변화를 표현할 수 있는 초서의 조형과 자유로운 필획은

창작 주체의 개성과 성정을 표현하기에 충분하였다.

초서의 예술적 자각으로 서예는 순수한 시각 예술의 중심 영역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조일(趙壹)의《비초서》는

제목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초서를 비판하는 서론이다.

그러나 사실 그 핵심은 초서라는 서체를 비판하기보다는

 초서를 쓰는 사람들을 비판하는 것이다.

 

한나라 시대에는 초서가 매우 유행하여 초서의 쓰는 능력만으로

관직을 주거나 받으려는 사람들이 생겨나기에까지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비초서(非草書)》는 당시 통치 사상으로 통일되어 자리잡은

유가(儒家) 철학을 중심으로 초서의 창작에 심취하여

경서(經書)의 학습과 본성의 수양보다는 초서의 창작으로 관직을 얻으려는 사람들은 비판하고

 동시에 초서의 근본을 밝히는 내용을 중심으로 한다.

 

조일(趙壹)은 당시에 유행하던 초서는

 법칙이 없으며 초서를 쓰는 사람들도 순수한 성정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초서 대신 창힐(倉頡)과 사주(史籒)가 만들었다고 전하고 있던

 전서 계열의 고체자(古體字)로의 복고를 주장하였다.

 

《비초서(非草書)》는 한 편의 예술 미학의 이론으로서는

 보수적이며 동시에 비발전적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내용의 반면에 나타난 미학 의의는

서예 미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 가운데에서 우리가 가장 주시하여야 할 점은 바로

당시 사람들의 초서에 대한 창작 열기와 심미적 가치에 대한 자각적 인식이다.

또한 초서와 초서를 쓰는 사람들을 비판하는 가운데에 나타나 있는

 창작 주체와 서예의 관계에 관한 미학 관점은 매우 높은 가치가 있다.

 

《비초서(非草書)》에서 조일(趙壹)은 초서의 탄생 배경으로

진나라 말기의 사회와 시대적 배경을 예로 들었으며

 그 논지의 핵심은 고체자(古體字)의 번잡함과 서사의 번거로움을 버리고

간결하고 빠름을 취한 것이라 하였다.

그는 유가(儒家)의 입장에서 초서가 자연 발생적으로 탄생하였거나

혹은 성인(聖人)의 창조물이 아니라고 비난하였지만 그의 문장에서 우리는

 초서의 탄생에 대한 비교적 신빙성 있는 근거를 찾을 수 있게 된다.

 

그는 또 초서의 효용에 대해서도 초서의 탄생과 동일한 견해를 제출하며 비판하였다.

그러나 바꾸어 생각 해보면 그가 비판한 내용은

 곧 초서의 긍정적 효용이며 예술적 가치임을 알 수 있다.

초서의 탄생에 관해 간결성의 추구로 초서가 탄생하였다는 주장과

‘임사종의(臨事從宜)’의 효용성을 제출한 것은

 초서가 전서 계열의 고체자(古體字)는 물론 금체자(今體字)의 어떤 서체보다도

 다양하게 변할 수 있으며 창작 주체의 주관적 개성을 더 많이

 담아서 표현할 수 있다는 결론으로 마무리된다.

 

《비초서》를 통해 우리는 당시에 초서가 매우 성숙하였을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초서의 창작에 심취하였으며

동시에 서예의 창작을 전문으로 하는 직업 서예가가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조일(趙壹)은 그는 당시 초서를 배우는 사람들은

두도(杜度)와 최원(崔瑗)의 법칙을 표준으로 삼아 어릴 때부터

초서의 연마에 많은 시간을 소비한다고 하였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초서의 학습과 창작을 전문으로 하여

 하루종일 피곤한 줄도 모르고 밤이 깊어도 쉬지 않고 밥 먹는 것조차도 잊고

초서를 연마하며 한 달에도 먹과 붓을 수없이 소비하고

몸과 이가 검게 될 정도이며 평상시에도 바닥이나 몸에 손으로 초서를 써서

손가락에서 피가 날 정도에까지 이르렀다고 비판하였다.

 

조일(趙壹)은 초서의 창작을 예로 들어 창작 주체와 서예의 관계에 대하여

 천성론(天性論)의 기초라 할 수 있는 기질론(氣質論)을 주장하였다.

그가 제시한 서예 미학 명제인

 ‘기혈(氣血)’과 ‘근골(筋骨)’, ‘심수(心手)’와 ‘공졸(工拙)’과

앞 시대가 뒤이어 오는 시대를 결정하는 중용한 요소라는 미학 사상은

후대의 서예 미학에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지금까지도 여전히 토론되고 있다.

 

그는 초서의 아름다움은 억지로 배워서 성취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무조건 모방하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역설하였다.

사람에게는 서로 다른 기혈(氣血)이 있고 근육과 골격도 다르며 성격과 재주가 각각 다르기 때문에 서예의 좋고 나쁨은 창작 주체의 정신과 재주에 달려 있는 것이지 억지로 이루어 질 수는 없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서예 미학 사상은 훗날 조위(曹魏)시대의

조비(趙丕)가 문학 이론에서 주장한 기질론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조비(趙丕)는 같은 곡조를 연주하더라도 연주자에 따라 다르게 들리는 것처럼

 문학 작품도 창작 주체의 내적 혹은 외적 특성에 다르게 표현된다고 하였다.

조비(趙丕)가 주장한 문학의 미학 사상과 조일(趙壹)의 미학 사상은

서로 일맥상통하고 있다.

이와 같은 미학 사상은 비록 창작 주체의 노력보다는

 천부적 재능만을 너무 강조한 느낌이 없진 않지만 예술의 창작에서

창작 주체의 개성을 중시한 미학 사상으로 후세의 서예 미학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조일(趙壹)은 당시 초서의 학습에 열중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아무리 열심히 초서를 연마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서예 작품의 좋고 나쁨에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며

 오히려 나쁜 것을 좋다고 여기고 따르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이것은 서예를 배우는 학습 원리에는 위배되는 미학 이론이다.

그러나 이 주장의 뒷면에서 우리는 그가

유가(儒家)의 공리주의 예술관에 입각하여 서예 미학을 자각하고 있었다

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비록 서예 미학 이론으로서는 결점을 갖추고 있으나

 이를 통해 우리는 한(漢)나라 시대 후기에 이르러 초서는 이미 성숙하였을 뿐 아니라

 서예의 창작과 미학적 연구가 높은 수준에 도달하였다는 것을 날 수 있다.

아울러 당시 서예의 실천과 이론이 이미 자각 상태에 들어서고 있었음을 알 수도 있다.

 

 

阿 
【来源】

本品为马科动物驴Equus asinus L.及其他驴皮经煎煮浓缩制成的固体胶。

用蛤粉炒成珠者称阿胶珠。

 산동성 동아현의 아교, 당나귀 가죽 아교

 

【性味、归经】

甘,平。归肺、肝、肾经。

 

【功效】

补血,止血,滋阴润燥。

 피를 보충해주고, 지혈의 효능이 있으며 정력을 왕성하게 해 주고

호흡기 피부등의 건조부위를 촉촉히 적셔 부드럽게 해준다.

 

【应用与配伍】
1.用于血虚萎黄,眩晕,心悸等。为补血之佳品。

常与熟地黄、当归、黄芪等补益气血药同用。

심계 가슴이 불안하여 두근거리는 증상
2. 用于多种出血证。止血作用良好。

对出血而兼见阴虚、血虚证者,尤为适宜。

治血热吐衄,配伍蒲黄、生地黄,如《千金翼方》,治吐衄咳唾失血既多,

虚倦神怯,配伍人参、白及等,如《痰火点雪》;治肺破嗽血,配伍人参、天冬、

北五味子、白及等,如《直指方》阿胶散;治便血如下豆汁,配伍当归、赤芍等,

如阿胶芍药汤;治先便后血,配伍白芍、黄连等,

如《医林集要》阿胶丸;治冲任不固,崩漏及妊娠下血,配伍生地黄、艾叶等,如胶艾汤。

 
3. 用于阴虚证及燥证。能滋阴润燥。

治温燥伤肺,干咳无痰,配伍麦冬、杏仁等,如清燥救

用于阴虚证及燥证。能滋阴润燥。

治温燥伤肺,干咳无痰,配伍麦冬、杏仁等,如清燥救肺汤,治热病伤阴,虚烦不眠,

配白芍、鸡子黄等,如黄连阿胶汤;治热病伤阴,液涸风动,手足瘈疭,配龟板、

牡蛎、白芍、生地黄等,如大定风珠。

 
阿胶的原产地是山东“东阿”,由于历史原因,东阿县治多有变迁,

因此阿胶原产地应为“泛东阿区”,即包括:

一、今属聊城市阳谷县的阿城镇,是最早的东阿县治所在地,阿胶似应诞生于此。二、今属济南市平阴县的东阿镇,福胶集团所在地。代表产品是“福”字牌和“东阿镇”牌阿胶,东阿镇是明代至中华民国(1947年)的东阿县城,阿胶制造业兴盛并成为贡品即始于此;东阿镇阿胶1915年巴拿马博览会获金牌;

三、今属聊城市东阿县,1947年以后东阿县的铜城镇成为东阿县驻地,也是东胶集团所在地,东阿集团是目前中国最大的阿胶生产企业。其中东阿镇被国家命名为中国阿胶之乡,并与茅台镇、景德镇一道成为受国家原产地保护的中国三大传统特产名镇;而古老的“阿胶井”则在今阿城镇西北2公里处的岳庄村。


阿胶Colla Asini (Gelatinum Asini) 别名:驴皮胶。

《纲目拾遗》:"治内伤腰痛,强力伸筋,添精固肾。"
【功用主治】

滋阴补血,安胎。治血虚,虚劳咳嗽,吐血,衄血、便血,妇女月经不调,

崩中,胎漏。

 

妊娠胎动
女人血痛、血枯、经水不调,无子,崩中,带下,胎前产后诸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