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7    업데이트: 24-03-19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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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山王三器
관리자 | 조회 569
中山王三器

민승준
【기물소개】
  

1974년 河北省 平山縣 中山國王陵에서 대량의 중산국문물이 발굴되었다. 河北省文物管理處에 따르면 1977년 6월 24일에 대정과 방호가 발굴되었다. 대규모 長篇 청동예기 명문의 발굴은 학계에 큰 의미를 던져주었다. 中山王三器銘文은 중산국에 관한 자료와 문헌이 미비했던 학계에 역사적 사료를 확실하게 제시해 주었기 때문이다. 특히 전국시대 언어와 문자를 연구함에 있어 큰 의의를 지니는 중대한 고고학적 업적이었다.
河北省 平山县 中山王陵에서 출토된 이 세 기물은 전국시대 청동기 예술의 높은 성취를 반영하고 있다. 게다가 선진시대 大篆 중 청동기 명문의 아름다움을 극대화 시킨 裝飾書體로 대미를 장식하고 있으며 보편적 명문의 서체미에서 볼 수 없던 고고함 등의 개성이 넘친다. 아울러 그 당시 靑銅禮器에는 잘 보여 지지 않던 長篇의 문자가 있는 銘文이라는 특수성이 있어 다른 명문과는 다른 비범함을 보여 주고 있다. 중산국명문은 전국시대 청동기 명문 중 장식적인 매력을 갖춘 매우 긴 명문이 있어 그 연구가치가 높다.
이 세 기물의 명문을 분석한 張守中의 통계에 의하면 출토된 器物은 모두 118점으로 靑銅器 90점, 玉器 26점, 木器 2점이며, 그 중 청동기에 가장 많은 명문이 수록되어 있다고 한다. 中山王方壶 450자, 中山王鼎 469자, 中山王圆壶 204자의 명문이 있다. 中山王三器 이외에도 중산국의 청동기 명문은 兆域圖에 418자에 달하는 장편의 청동기 명문이 있다. 이는 靑銅禮器銘文으로 흔치 않았던 굉장히 많은 수량의 명문이었다. 게다가 그 당시에는 드물었던 새김의 방식으로 제작된 것이 독특하다. 中山國 靑銅器의 화려한 제작기법인 错金, 错银된 상감기법과 中山王三器 銘文에 보이는 마찰감이 돋보이는 새김 기술이 조화되어 중산국 청동기 명문은 전국시대 남방의 조충서와는 다른 미감을 풍기는 북방지역의 장식체명문이 되었다.
【기물명칭】
  전국시대 중산국에서 제작된 청동기 명문 가운데 유독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中山王三器’이다. 중국 하북성 평산현 중산왕릉에서 출토된 청동기 유물 가운데 가장 많은 문자가 기물 외벽에 새김의 기법으로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바로 ‘中山王 鼎’, ‘中山王 壶’, ‘中山王   壶’ 이렇게 세 기물이다. 기원전 315년 제후의 칭호를 버리고 천자와 같은 왕(王)을  칭했던 魏 趙 韓 燕과 같이 中山君 착( )도 스스로를 왕이라 칭하게 된다. 이 중요한 사건에 비중을 두고 지어진 명칭이다. 한편 기물모양과 특징에 따른 이름도 있다. 즉 철로 제작된 발이 붙어 있는 거대한 鼎이어서 ‘鐵足大鼎’, 기룡무늬가 있는 네모난 호여서 ‘夔龍紋方壺’, 청동으로 된 둥근 형태의 호여서 ‘銅圓壺’라고도 불리어지기도 한다. 중국학계에선 이 세 기물을 아울러 ‘中山王三器’라 부르고 있는데 이외에도 발굴된 지명을 따서 ‘平山三器’라고도 부르기도 하며 세 기물은 각각 中山王鼎, 中山王方壺, 中山王圓壺으로도 불린다. 이는 중산왕  착( )과 중산왕 치에츠의 고대글자의 발음의 부정확성과 문서화작업의 곤란으로 인해 편의상의 구분으로 보여진다. 하지만 이 세 기물은 중산왕의 왕릉에서 출토된 유물이며 왕이름이 銘文에 명확히 드러나 있으므로 보다 분명하게 왕이름을 넣은 명칭이 합당하다고  보여진다. 아울러 서체나 제작된 시기로 보면 착왕의 두 기물(鼎, 方壺)과 치에츠왕(圓壺)의 것은 구분을 해 주어야 한다고 보여진다. 张守中는 『中山王 器文字编』라고 착왕의 이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中山國의 靑銅器 文化】
 
郭沫若(1892~1978)은 <서주, 동주시대 금문의 고찰과 해석> 중에 ‘杕氏壺’를 거론했는데, 이 청동기 기물의 명문이 바로 명확하게 이야기 할 수 있는 중산국의 제일 초기 청동기이다. 이 후에도 춘추시대부터 전국시대 전기에 이르기는 기원전 6세기에서 기원전 5세기까지 墓葬 가운데, 많은 청동기가 출토되었다. 대표적인 묘장으로는 河北省 行唐縣의 李家莊, 廟上村의 黃龍崗, 北城子, 釣魚台 및 滿城縣의 采石廠, 平山縣의 訪家莊, 新樂縣의 中同村 등이 있다. 중산국 경내의 주요한 청동기물로는 鼎·甗·豆·壺·盤·鑿 등이고, 어떤 묘에는 '豆'형식의 釜·瓿·簋·敦 등도 있다.
戰國時期 中山國 青銅器는 河北省 平山縣 三汲에 위치한 中山王墓에서 출토된 유물이 대표적이다. 출토되어진 청동기로는 鼎·鬲·簋·盒·豆·壺·盉·盤·神獸·編鍾·屏座·帳構· 兵器·車馬器·山字形器·兆域圖版 등이 있다. 그 중 많은 청동기상에 새겨지거나 주조된 명문이 있었다. 이들 중 장편 청동기 명문이 있는 것으로는 鼎, 壺, 兆域圖版이 있다. 그중 새겨진 명문은 鐵足大鼎, 夔龍飾方壺, 銅圓壺가 가장 돋보인다. 모두 1099자로 중산국 역사의 공백을 메워주고 있으며, 아울러 제작시기가 기원전 321년부터 기원전 314년이었음도 명확히 알려주고 있어 역사사료 증명에 가치가 있다.
 중산국 청동기는 대표적 특색인 금, 은으로 상감된 기법과 아울러 독특한 청동기 제작기법을 보이고 있다. 바로 두 종류의 다른 금속으로 복합 주조한 기법이다. 中山王三器중의 하나인 ‘中山王 鼎’을 보면 청동으로 된 몸통과 철로 된 발이 복합적으로 사용된 것을 알 수 있다. 그 기법상 특징으로 ‘鐵足大鼎’이라고도 불리는 것이다.
중산국은 춘추전국시대 太行山 남쪽에 자리한 작은 나라이다. 燕나라와 赵나라 사이에 끼여 있는 중산국은 중국 북방 소수민족 白狄족의 한 갈래인 鲜虞人이 세운 국가이다. 지금의 河北省의 경계 내에 있으며 正定县을 중심으로 한다. 중산국은 기원전 6세기쯤 陝西省 북쪽지역에 거주하던 白狄들에 의해 세워졌다. 燕 趙 齊 강대국 사이에 끼여 있는 지리적인 위치로 인해 비록 긴 세월동안 강대국의 침략을 받으며 중원문화의 영향아래 놓여 있었다. 하지만 춘추전국시대에 이르기까지 북방유목민족의 문화적 특색을 잃지 않고 매우 잘 보존해 내려왔다. 강대국사이에서 자신의 문화를 지키며 끈질기게 살아남은 저력은 우리나라와 비슷하다. 이형구는 중국학자들이 밝히기를 꺼려하는 鲜于璜碑 비문 좌측하단의 箕子에 대한 기록을 제시하였고, 중산국의 대표적 문물인 ‘山’자형 청동기 휘장과 신라금관의 근접성, 중산왕릉과 동이족의 전형적인 묘지형태인 享堂의 유사성을 비교하며 우리나라와의 밀접한 관계를 연구하고 있다.
중산국은 독창적인 예술성을 이룩하였다. 중국학계의 이목을 끈 것은 이전에 보여지지 않던 독특한 조형인 청동으로 만들어진 ‘山’자 모양의 기물이다. 成王의 무덤에서 5점, 王의 무덤에서 6점, 모두 11점이 출토되었다. 이 청동기물은 119-142㎝로 무게와 크기가 대단했다. 전국시대의 청동기 주조공예기술은 전 시대 보다 크게 성장했음을 볼 수 있다. 중산국 사람들은 각종 선진적인 청동기공예 제작기술을 잘 갖추어 자신들의 문화도 한층 더 발전시켰다. 전국시대 중기에 이르러 청동기에 명문을 새겼다. 중산왕릉에서 발견된 대형 禮器석 점이 바로 中山王三器로 모두 기물의 표면에 칼로 새긴 것이다. 그 기술이 특히 뛰어나 아주 높은 예술적 가치를 지닌다. 또한 중산왕릉에서 출토된 문물가운데 玉器는 1000여 개 이상인데, 그것들은 단단하고 윤택하면 색이 온화하다. 숭고함과 보배로움의 상징이다. 대부분 추상적인 동물 형태가 새겨져 있다.
중산국의 청동기 기술자들은 기물형태의 우아미를 매우 강조했다고 전해진다. 그들은 인물과 동물형상의 각종자태와 생동감 넘치는 모습뿐만 아니라, 교묘하게 인물, 동물과 상응하는 꽃무늬 및 각종기물의 장식도 담아내어 그것들이 서로 혼연일체되여 정말 살아있는 느낌을 준다. 이러한 것은 금, 은으로 상감된 기법으로 청동에 제작된 ‘雙翼神兽’ 신화 속 날개달린 신비한 짐승과 ‘象嵌虎筮鹿屛風揷座’ 사슴을 잡아먹는 맹렬한 호랑이 형상의 가리개 받침대가 대표적이다. 쌍익신수는 ‘有翼神獸’로도 불리며 그 높이는 40.5㎝이다. ‘象嵌虎筮鹿屛風揷座’의 높이는 51㎝로 기물 표면에 금을 상감하여 풍부하고 다채로운 더욱 수려한 모습을 띤다. 또 하나 빠트릴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十五連盞銅燈’이다. ‘樹形連盞’이라고도 불리는 나무 형태의 등잔이다. 15개의 이어진 등잔 위에 8마리 귀여운 원숭이들이 기어오르며 노는 조형이 생동감 넘친다. 그뿐 아니라 곱고 아리따운 도안이 어울려 있다. 북방 유목민족의 기동성 있고 민첩하며 기민한 기상이 뿜어져 나오고 있다.
한편 중산국 사람들은 술을 잘 빚었다고 전해진다. 지금까지 이어 내려오는 술과 관계된 많은 신기한 이야기들이 있다. 고분에서 출토된 술은 이미 매장된 지 2300년이 넘었다. 그런데 여전히 그윽한 향내가 품어져 나오는 듯하다. 이는 최근 세계에서 제일 처음 발견된 가장 오래된 실물의 술이라고 한다. 이러한 풍부한 문화유산은 中山国 사람들이 총명하고 지혜로웠다는 사실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북방의 우수한 문화를 계승한 동시에 중원문화를 흡수하여 찬란한 문화를 창조해냈다.
 
【中山國 靑銅器銘文의 分析】

中山王鼎은 높이가 51.5㎝이고 鼎의 덮개에 있는 세 개의 뉴와 세 발 사이에 77행 467자의 명문이 镌刻되어 있다. 中山王方壶는 높이가 63㎝이다. 네 면에 전부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각 면은 10행으로 이루어져 있고 매 행마다 일반적으로 12자씩 포치되어 있다. 전체 명문 수는 450자이다. 中山王圆壶는 명문 수가 셋 중에서 제일 적다. 높이는 44.5㎝이고 복부에는 3줄 59행으로 177자의 명문에 새겨져 있다. 또한 中山王圆壶 圈足에도 몇자가 있다.
이 중산왕삼기 명문을 서로 비교해 보면 명확하게 들어나진 않지만 미묘한 차이가 있다. 中山王鼎이 다른 것들 보다 좀 더 거친 숨이 느껴진다. 中山王鼎은 발이 철로 만들어지면서 제작시 청동과 철이 섞여진 것을 볼 수 있다. 전체가 청동으로만 만들어진 中山王方壺와 中山王圓壺에 새기는 것에 비해 마찰감이 더 발생했을 것이다. 두 종류의 다른 금속으로 복합 주조되어 기물 면이 더 단단할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中山王三器 铭文의 전체 章法에서는 얼마나 잘 구성되어 있는지 감탄이 절로 나온다. 이는 전체적으로 얼마나 치밀하고 정교한 계산과 디자인적 고민을 거쳐 이루어진 것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글자와 글자 사이 행과 행 사이의 공간도 매우 엄정하게 지키고 있다.
중산왕삼기의 명문은 자형이 길고 늘씬하며 장식성을 갖추고 있다. 이런 모습은 그 당시 아름답게 꾸며진 명문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특색이다. 그렇다면 中山王三器 銘文만의 서체의 특색을 살펴보자. 새김의 방법에 주목하자. 새겨졌기 때문에 기존의 주조된 명문들에서 흔히 보이던 塊面은 찾아볼 수가 없다. 이로 인해 전국시대 북방지역의 특징인 웅장하며 힘이 넘치는 剛峭한 느낌이 더 부각되어지는 것이다. 같은 시기 다른 명문에 비해 과장된 표현이 드물고 산뜻하고 선명한 기운이 느껴진다. 塊面은 그 형식이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주물로 만들어진 명문에서 흔히 보이게 되는 획이 굵어지는 변화와 획과 획이 만난 그 부분이 부풀어 오른 느낌의 熔铸感이다. 다른 하나는 좀 더 과장된 塊面적 표현이다. 남방과 북방의 과장된 표현은 王子午鼎과 陈纯釜의 명문에서 잘 드러난다. 춘추시대 중, 말기 楚의 王子午鼎 명문의 ‘福’자 있다. 결구 및 포치상의 장식에 속하기도 하고, 순수하게 文字美化의 필요로 인해 첨가되기도 한 전국시대 齊의 陳純釜 銘文의 ‘둥근 점’을 들 수 있다. 王子午鼎 명문 가운데 ‘福’자는 이 두 가지 덩어리감을 다 갖추고 있다. ‘示’에서는 획의 굵기의 변화와 획이 만나는 부분의 변화를 볼 수 있고, ‘田’은 과장된 면적인 표현을 하고 있다. 이에 비해 中山王三器 명문에선 이런 塊面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쭉쭉 뻗어 강건하고 힘 있는 직선이 특징인 中山国三器 명문도 곡선과 조화되는 부분들이 있다. 직선과 호선이 완벽하게 융합되어 있는 특징이 있는 것이다. 이 모습을 보고 있으면 중산국의 문화가 떠오른다. 华夏문화와 白狄문화가 잘 어우러진 모습이 상상되는 것이다. 이런 직선과 호선의 자연스런 융합은 문자결체를 고도의 아름다운 경지로 이끌고 있다. 한편 ‘氏’, ‘夜’, ‘明’ 등의 글자에서 보이는 점과 획의 끝을 돌돌 말아 표현하는 장식성은 자칫 지나치게 엄숙할 수 있는 정적인 분위기를 화기발랄하게 동적으로 이끌고 있다. 이러한 표현은 주로 점과 획이 끝나는 수필부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전국시대 다양한 文字美化의 서막을 열었다고 평가되는 楚의 대표적 장식체인 王子午鼎 铭文과 대조해 보면 중산왕삼기 명문의 특징이 확연히 들어난다. 하나는 남쪽에서 다른 하나는 북쪽에서 각각 서로 호응되고 대비되면서 춘추전국시대 조충서 명문 중에서 쌍벽으로 불려진다. 왕자오정 명문은 조충서 발전의 서곡을 연주해주고 중산왕삼기 명문은 조충서의 종결의 막을 알리고 있다. 물론 王子午鼎은 춘추시대 중, 말기이고 中山王三器 铭文은 전국시대 중, 말기이여서 시기적으로 조금 차이는 있다. 하지만 장편의 장식체 명문이라는 공통점과 전국시대 청동기 명문 장식미의 시작과 끝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 남과 북을 대표할 만한 장식체 명문이므로 두 명문은 서로 비교 분석할 만한 가치가 있다. 남방지역 춘추시대 명문인 王子午鼎 铭文에서는 鑄造되어진 영향으로 서주시대 청동기 명문에서 보였던 획과 획이 만난 부분에서 塊面이 남아있다. 이런 부분이 진귀하고 우아한 아름다움을 부각시켜 주고 있다. 이런 덩어리감이 비록 서주시대에 비해 많이 약화되었지만 제작된 기법의 동일화로 그런 모습이 여전히 남아 있는데 반해 中山王三器 명문에는 线적인 느낌이 더 강하며 심지어 획과 획을 떨어뜨려 표현하고 있기 까지 하다.
 
 中山王 壺
 
【기물소개】
   
 
 
 
 
 
 


중산왕착호(中山王 壶)는 중산국의 제5대 왕 착의 이름을 토대로 붙여진 명칭이다. 중산왕착호는 중국 전국시대 드물게 보이는 장편의 銘文이 있는 청동예기이다. 전국시대 중기 이후 청동기 기물 외벽에 摩擦을 일으켜 镌刻하는 방식으로 제작된 것이다. 게다가 북방소수민족과 중원의 華夏민족의 문화가 융합된 새로운 미감이 銘文에 반영되었다. 중산국 청동기 명문만의 美가 무엇인지 말로 표현하기 힘들지만 가만히 보고 있으면 다른 명문에서와는 뭔가 특별한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명문의 미감을 파악하는 데 있어 중요한 것은 중산국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그들의 삶의 흔적을 살펴보는 것이다. 지리적인 여건으로 중원의 영향을 받았으나 그들만의 전통을 잘 살려 내려온 북방소수민족의 문화적 특색, 남방과는 다른 거친 자연환경조건, 강대국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 있었다. 그런 그들의 몸짓과 삶의 흔적들이 인간의 감정을 잘 살릴 수 있는 새김이라는 기법과 어우러지자 중산국 청동기 명문만의 독특한 매력이 나올 수 있게 되었다고 보인다. 새김의 떨림, 마찰이 될 때의 열기, 자극을 받아 터지는 느낌들이 정교하게 드러나 기존의 주물로 제작된 명문들과는 다른, 색다른 느낌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중산왕착호는 中山王方壺라고도 불린다. 높이는 63cm, 지름은 35cm이다. 기물의 윗 부분을 보면 뚜껑에 구름문양으로 된 뉴(鈕)가 있어 측면의 기물의 어깨부분에 있는 夔龍紋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기룡의 모양이 네 모서리에 꿈틀거리고 있으며 양쪽 손잡이에도 정교한 도철문의 铺首가 보인다. 祭禮를 목적으로 한 기물로 중산왕의 위대함을 神聖化시키기 위해 饕餮문양으로 외곽을 장식해 범접할 수 없는 숭고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4개의 면으로 나누어져 모가 나있으면서도 배가 불룩하여 圓과 方의 미감을 함께 가지고 있는 재밌는 구조의 壺이다. 4면에 전부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각 면은 10행으로 이루어져 있고 매 행마다 일반적으로 12자씩 포치되어 있다. 두 측면에 있는 铺首로 인해 밖 두 행 각 2자씩, 안 4행 각 3자씩 누락되어 있으며 중복되는 글자부호가 3개, 합문 부호 1개로 전체 명문 수는 450자이다. 대정보다 조금 빨리 주조되었다.
 
 
 
 
 
 
【중산국 착왕 이전의 역사】
 
BC.415년 (文公)
晉 出公이 즉위하던 때(BC.474—459)에 晉의 智伯이 中山仇由氏를 멸망시킨다. 이렇듯 초기의 선우중산국(鲜于中山國)이 분산된 시기이다. BC455년 전후에는 趙 襄子가 穆子를 파견하여 鲜于中人城을 치게 했다.
  BC.414~407년 (武公)
中山의 武公이 왕위를 잡은 후 고(顧)에 수도를 정한다. 그 후에 桓公이 영수(靈壽)로 수도를 옮긴다. 魏 文侯가 樂羊에게 中山을 공격하게 한다.
 
BC.406~340년 (桓公)
魏가 중산국을 멸망시킨다. 이로서 초기선우중산국은 멸망했다. 魏는 太子인 字击(후에 子挚이 된다)를 중산군(中山君)으로 책봉했다. 趙倉唐을 사신으로 보내 이 사실을 전했다. 魏의 문후가 樂羊을 中山의 영수(靈壽)로 책봉하여 무력으로 협박하고 李悝를 파견하여 중산을 다스렸다.
 
BC.406~381년
魏나라의 통치시기이다. (魏 文候 40년부터 魏 武侯 15년까지) BC.381년, 선우 중산이 나라를 다시 세운다. 中山의 제후였던 子挚(혹은 그 후인)이 魏나라로 도망갔다.
 
BC.339~328년 (成王)
赤狄의 유민들이 백적선우씨(白狄鲜虞氏)들이 일으킨 나라 회복 투쟁의 영향으로 发动反魏를 거부하는 봉기가 일어났다. 지금의 山西省 翼城縣 ‘浍’에서 위나라 군사를 격파했다. 趙가 中山을 침략했다. 中山과 房子에서 싸웠다. 趙가 中山을 침략하여 中人邑에서 싸웠다. 中山이 긴 성을 쌓았다. 齊와 魏가 힘을 합해 趙를 공격했다. 중산은 제와 위의 세력을 믿고 물을 끌어다 趙나라 땅인 호(鄗)를 포위했다.
 
 
 
【명문사진】
 
 
 
중산왕착호의 4면에 모두 명문이 새겨져 있다. 중산왕착호의 명문이 포치된 장법은 치밀하게 계산되어 있다. 각각의 면에 10줄이 있으며 한 줄에는 12자가 있다. 이 계산대로라면 한 면이 120자 이므로 총 480자의 명문이 있다. 하지만 두 면에 손잡이를 달고 있는 도철문양이 있다. 한 면에 16자의 자리를 도철문양이 차지하고 있으며 중복되는 글자부호가 3개 합문부호가 1개있어 명문은 모두 450자이다. 중산왕 착의 명을 받아 재상 주가 제작했으며 大鼎보다 빨리 만들어졌다.
 <제 1 면>
  
 
 
 
 
  
 
 
 
<제 2 면>
  
 
 
 
 
 
 
 
<제 3 면>
  
 
 
 
 
 
<제 4 면>
 
  
 
【석문】
 
 
第一
 
 
 
隹(唯)十三(四)年,中山王  命相邦賈,斁(擇)郾(燕)吉金,  (鑄)為彝壺,節於  (禋)  (齊). 可 (法)可尚(常),  (以)鄉(饗)上帝,  (以)祀先王. 穆=濟=,嚴敬不敢  (怠)荒,因  (載)所美,邵(昭)  (則)皇工(功),  (詆)郾(燕)之訛,  (以)憼(儆)嗣王.
 
 
14년, 중산왕 착은 상방 賈(司馬賙)에게 명을 내려 연나라의 최상급의 금을 구해서 청동예기 中山王方壺를 주조하게 하고 천제(天祭)를 지내게 한다. 이 기물을 법으로 삼고 그 의미를 늘 간직하여 상제에게 향식의 제를 올리고 선조에게 제사를 지내도록 한다. 거룩하고 거룩하도다! 매우 공경스러워 감히 황망되게 하지 못할지니 아름다운 바를 담아내고 왕의 공을 밝히며 燕의 과오를 꾸짖는 것 경계로 삼아 앞으로 왕의 뒤를 잘 이어가야한다.
 
1. 隹(唯)十三(四)年,中山王  命相邦賈
 
隹: 새 모습을 딴 형상이다. 짧은 털을 가진 새의 보편적 이름으로 상형이다. 先秦시대 허사로 자주 사용된 글자이다. 일반적으로 발어사의 작용을 하며 특별한 문자적 의미는 없다. 唯는 隹 惟 维와 통용된다. 금문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보이는 것은 唯이다. 은주시대 청동기명문에서 명문의 제1행 첫 번째 글자로「隹(唯)」는 자주 출현하는데 전국 중산국 중산삼기 중 치에츠원호에서는 제22행의 첫 글자로 문장의 중반에 나오는 특색이 있다. 나오는 위치는 달랐지만 그 의미는 대정 방호와 같다.
相邦: 「相」에 대해서는《韓非子·說林上》에는 相室이란 말이 보인다.(孤憤篇)舊注雲:「相室,家臣也」《璽彙》4561-4563에도「相室」이란 璽가 있다. 한 나라에「相邦」있는 것과 같이 한 집에는「相室」이 있었던 것이다. 「相」與「曾徒子,善相劍者也」《韓非子·說林上》的「相」同羲.
賈: 여기서 지칭하는 것은 중산국에서 상방을 역임했던 대신 賙이다. 이 인물은 중산왕삼기뿐 아니라 조역도에도 출현하는 것을 보면 중산국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던 것 같다.
 
2. 斁(擇)郾(燕)吉金
 
斁:「擇」으로 읽는다. 그 용례는 시경에 보인다. 《詩·大雅·思齊》:「古之人無斁」鄭《箋》作「擇」 郾:전적을 보면「燕」으로 사용되고 있다. 연나라의 燕의 본래 글자이다. 금문에서는 이 글자를 처음에는  로 썼다. 이를 이어 匽으로 사용되다가 뒤에 郾으로 사용했다.
吉金: 우수한 최상품의 금이다. 사례를 보면 아래와 같다. 《國語·齊語》:「美金以鑄劍戟,試諸狗罵;惡金以鑄鉏 夷 斤 斸,試諸壤土」 《國語·越語下》:「王命工以良金寫範蠡之狀而朝禮之」韋昭《注》:「以善金鑄其形狀,而自朝禮之」《荀子·彊國》:「刑范正,金錫美,工冶巧」《邾大宰鐘》:「吉金元呂」吉金亦稱「元金」,《子犯龢鐘》:「諸侯羞元金於子犯之所」.
 
3.  (鑄)為彝壺
 
 :「鑄」를 대신하는 소리부호의 이체자이다. 「寸」에서 나온 고대 音은 幽部에서「壽」에서 나온 소리글자와 서로 상통한다. 비슷한 용례는 다음과 같다.《說文》「  」字下雲:「《周書》以為討」 《詩·小弁》:「惄焉如擣」 「擣」《韓詩》作「疛」 《玉篇·廣部》:「疛,心疾也,  同」 朱德熙는 金과 寸으로 이루어진 이 글자는 전체 문장의 의미로 보아 동사이며 마땅히 鑄의 이체자로 봄이 옳다고 했고 于豪亮는 획이 생략된 형태로 이는 疛가  의 획이 생략된 것과 같다고 했다. 于豪亮는《诗·小弁》:‘惄焉如擣’,《释文》:‘擣,本或作  ,韩诗作疛’라는 용례를 밝혔다. 또한 모전과 옥편에서도 疛字를  字와 같이 보고 있다. 그러므로  는 鑄 로 봐야한다.
「斁(择)郾(燕)吉金」과 「  (铸)为彝壶」의 고석을 통해 중산왕 착이 방호와 대정을 제작한 시기와 재료에 대해 이해할 수 있다. 중산국이 연나라로 출병한 역사적 사실도 엿볼 수 있다.
 
4. 節于  (禋)  (齊)
 
節于에 대해서는 子禾子釜과 陳純釜에도 보여진다. “左之釜节于廩釜” 《周易·颐》:“君子以慎言语,节饮食”일을 잘 조절하는 절재력이나 법도에 잘 부합되는 것을 의미한다. 다음과 같이 사용되어졌다. 「左關(之)釜節于廩釜」 《周易·頤卦》: 「君子以慎言語,節飲食」 《節卦》: 「節享,苦節不可貞」 《疏》:「節者,制度之名,節止之羲,制事有節,其道乃享」 이로 미루어 보아 節의 의미가 ‘制事有節 合於法度’임을 알 수 있다.
 (禋)  (齊):蔡哲茂는「禋齊」로 읽고 있다. 「  」는 아마도「  」의 영향을 받아 「酉」편방이 더해진 것이 아닌지 추정된다.
  ,于豪亮은 玉篇에서“  ,酒五  之名”라 했고  는 또한 齊의 의미를 지니는 齋로 보았다. 《左传·隱公16年》:“而况能禋祀许乎”,杜注:“絜齐以享谓之禋祀” 제사에 임하는 경건하고 공손한 정재된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는 “絜齊以享(깨끗이 정재하여 바치다)”의 뜻이다. 고대의 통치계급은 제사를 거행함에 앞서 음식에 대해 평소에 비해 훨씬 더 엄밀하게 살폈다. 하지만 제사 음식의 량을 조절하지 못해 과도하게 되곤 했다. 제사에 술을 올리는데 사용된 제기였던 중산왕착호의 외벽에 새겨진 节于   으로 보아 지나치게 량을 초과하지 말도록 경계한 의미로 보여진다.
 
5. 可  (法)可尚(常)
 
 는 「法」이다. 《周易·繫辞上》:“制而用之谓之法” 「尚」은 「常」으로 읽는다. 용례는 다음과 같다. 《詩·魯頌·閟宮》:「魯邦是常」 鄭《箋》:「常,守也 蓋取典守之羲」 한편 吕氏春秋 古樂편에서는 尚는 久라 했다. 즉 오래되어 늘 항상 변함이 없는 것의 의미이다. 商承祚은 여기에서의 尚은 常으로 읽어야 한다고 보았다. 술은 술을 따르는 제기에서 오래도록 잘 보전되어 후대에 전해져야 한다는 뜻이다. 사실 이처럼 중산왕묘(M1)에서 출토된 청동예기 원호 중에서는 지금까지 술 원액이 전해지고 있다.
 
6.  (以)鄉(饗)上帝,  (以)祀先王
  
鄉은 「饗」이다. 「饗」는 「鄉」 위에 같은 뜻을 지니는 「食」편방이 더해져서 만들어졌다. 《逸周書·作雒》:「乃設丘兆於南郊,以祀上帝,配以後稷,日月星辰先王皆與食」 이 두 구절은 기물을 제작한 용도를 대변하고 있다.  陵君 청동기 명문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전해진다. 「  (以)祀皇祖,  (以)會父兄」 기물을 제작한 목적이 신과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함이라는 뜻을 잘 표현하고 있다. 《逸周书·作雒》:“乃设丘兆于南郊,以祀上帝,配以后稷,日月星辰先王皆与食”
 
6. 穆=濟=,嚴敬不敢  (怠)荒
 
穆穆濟濟:蔡哲茂은 거룩하고 공경스런 모습으로 이해한다. 林宏明도 같은 견해였고 다음과 같은 용례를 들었다. 《爾雅·釋詁》:「敬也」; 濟濟:《廣雅·釋訓》:「敬也」 《詩·大雅·械樸》:「濟濟辟王,左右趣之. 濟濟辟王,左右奉璋.」
嚴敬:한서에 같은 용례가 있다.《漢書·五行志》:「王者即位…慎其齋戒,致其嚴敬」《亢倉子·臣道》:「君不嚴敬大臣,不彰信小臣」
怠荒:《逸周書·盈法》:「外內從亂曰荒,好樂怠政曰荒」 乃望文生羲《孟子·梁惠王下》:「從獸無厥謂之荒」 《國語·魯語上》載曹劌諫莊公如齊觀社有「其閒無由荒怠」之語 《詩·商頌·殷武》:「不敢怠遑」 假遑為荒. 여기에서의 ‘遑’은 느긋하게 지내는 것을 의미한다. 政事를 봄에 있어 감히 여유있게 해서는 안 됨을 뜻한다.
 
7. 因  (載)所美,邵(昭)  (則)皇工(功)
 
 :「載」와 같이 소리부호의 번체와 간체가 다른 이체자이다. 「  」는 「才」라는 聲符를 따르고 「載」는 「  」 라는 聲符를 따르므로 「  」는 본래 「才」와 같은 소리를 갖게 된다. 邵:「昭」로 읽으며 밝다는 뜻이다. 뒷 단락에 나오는 「昭告後嗣」에도 나온다.
 :이 글자는 학자들마다 고석이 다르며 의견들이 분분하다. 낱 글자로는 단독으로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이 글자 아래에 나오는 문장을 보면 「明  之于壺而時觀焉」이 있는데 이 구절이 骉羌鐘銘文의 「明則之於銘」과 유사하다. 이를 근거로 「則」으로 유추하는 학자들이 있다. 朱德熙가 「則」으로 보았다. 于豪亮은  는 사람이 발에 족갑을 차고 있는 형상으로 보았고 비슷한 음을 達로 삼았다. 李学勤은 肆로 읽고 뜻은 陣으로 보았다. 「邵  」은 皇의 공로가 밝고 넓게 드러나는 것이라 해석했다. 張政烺과 林宏明은 “厠”으로 보았다. 《仓颉篇》注:‘厕,次也’ 次는 지위를 대등하게 하거나 진열한다는 뜻이다. 문장에서 뜻은 통할 수 있다. 林宏明은 張政烺의 이론적 근거가 타당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왜냐면 《广雅·释诂一》:“皇,美也” 이므로 “邵(昭)  (達)皇工(功)”의 뜻은 선왕이 훌륭한 공과 큰 업적을 표창한다는 것이다. ‘仄’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说文에서는 仄은 한쪽으로 치우친 것으로 본다. 한쪽 발이 병이 있어 쉽게 절뚝대는 모습을 표시하는 指事字로 의심된다.
 
8.  (詆)郾(燕)之訛
 :「詆」와 같이 소리부호의 번체와 간체가 다른 이체자이다. 「詆」는 들추어내다 비난하다 끄집어내 비평하는 뜻이다. 연나라의 과오를 본보기로 삼아 경계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비슷한 뜻을 가지는 것으로 厎와 底도 있다. 그 용례는 다음과 같다. 《詛楚文》:「厎楚王熊相之多罪」 《國語·周語下》 言武王 「以太簇之下宮,布令于商,昭顯文德,底紂之多罪」 韋昭《注》:「底,致也」
 
9.  (以)憼(儆)嗣王
「憼」은 「儆」이나 「警」으로 읽는다. 설문에서는 경계하다는 용례가 있다. 《說文·言部》:「警,戒也」 《說文·人部》:「儆,戒也」 묵자에서는「  」이 보이는데 警의 이체자이다. 《墨子·明鬼下》:「為君者以教其臣,為父者以  其子」 상서와 맹자에서는 「儆」을 「警」로 사용한 다음과 같은 용례가 있다. 《尚書·大禹謨》:「降水儆予」 《孟子·滕文公上》 순자에도 戒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荀子·賦》:「憼革戒兵」 楊倞注:「憼,與儆同,戒也」 중산왕 착 호 명문의「以戒嗣王」에서도 이와 같은 의미로 보이고 있으며 戒로 고석한다.
 
第二
隹(唯)朕皇祖文武  (桓)祖成考,是(寔)又(有)  (純)  (德)遺(訓),  (以)陀(施)及子孫,用隹(唯)朕所放. 慈孝  (寬)惠,  (舉)孯(賢)  (使)能. 天不  (斁)其又(有)  (願),  (使) (得)孯(賢)在(士)良  (佐)賈,  (以)輔相氒(厥)身. 余智(知)其忠  (信)施(也),而  (專)賃(任)之邦. 氏(是)  (以)遊夕  (飲)飤(食),  (靡)又(有)  (遽)  (惕).
 
짐은 선왕이신 文公 武公 桓公과 할아버지 成王을 생각해볼진대 참으로 다들 순려한 덕과 유구히 남겨진 가르침이 있었다. 그들은 이 가르침을 자손들에게 남겨 시행하게 하였다. 이제는 내가 이를 풀어놓는 바이다. 자애 효성 관용 은혜로운 성현을 등용할 줄 아는 이를 천거하라. 하늘 또한 그 바램을 싫어하지 않을지니 司馬賙를 도울만한 성현을 구해서 나라의 안위를 잘 지킬 수 있게 하라. 짐이 그 忠과 信을 알고 변함없이 나라를 믿고 맡길 수 있다면 봄가을로 연중 두 차례 巡行할 때 갑자기 두려워지게 되는 것이 적어질 지어다.
 
1. 隹(惟)朕皇祖文武  (桓)祖成考
 
「皇祖 文武桓 祖 成」 여기에서는 전국 중산국의 역대 국왕에 대해 알아볼 수 있다. 중산국 왕들의 즉위연대는 다음과 같다. 文公(BC415이전)武公(BC414~407)桓公(BC406~340)成王(BC339~328). 「皇」 서체 결구를 토대로 「皇」이 「冠」과 같음을 고증할 수 있다. 王荣寶는 「皇」은 ‘日’이 冠이 머리에 닿는 원형을 상징하고 ‘川’이 冠의 장식이 되며 土은 왕관의 받침을 상징한다.”고 했다. 李學勤도 「皇」은 또한 「冠」으로 불리는데 깃털이 그것을 장식하고 있다고 했다. 皇祖는 먼 조상, 祖는 가까운 조상로 보여진다.
 
2. 是(寔)又(有)  (純)  (德)遺(訓)
 
「是」 寔으로 본다. 뜻은 ‘참으로’이다. 《禮記》 「寔受其福」 「實」고 같은 의미를 가진다. 《國語·周語上》:「實有爽德」 중산국 명문의 「是」는 「氏」를 그것으로 삼는다.
「純德」 先秦시대의 純德은 온전함을 오래도록 지켜내는 덕성으로 볼 수 있다. 「純」 은 專, 壹로 오로지 하나같은 늘 변함없는 恒의 정신을 의미한다. 그 용례는 다음과 같다. 《國語·周語上》:「吾聞夫犬戎樹惇,帥舊德而守終純固,其有以禦我矣!」 韋昭《注》:「純,專也」 《國語周語下》:久固則純」 《國語晉語九》:「德不純而福祿並至,谓之幸」 韋昭《注》:「純,壹也」 《國語·鄭語》:「建九紀以立純德」 韋昭《注》:「純,純一不駁也」
「純德」 은 또한 넓게는 大德과 厚德의 의미로 볼 수도 있다. 「《命瓜君壺》:「承受屯(純)德,祈無疆,至於萬億年」 《國語·晋語六》载范文子曰:「吾聞之,惟厚德者能受多福」 又《晋語九》 载趙襄子曰:「吾聞之,德不純而福禄並至,謂之幸」,此厚德與德不純對語.
「遺訓」 선왕의 가르침이다. 遺訓,《逸周書·嘗麥》:「今予小子聞有古遗訓」 《國語·周語下》:「若啓先王之遗訓,省其典圖刑法,而觀其廢興者,皆可知也」 《國語·周語上》:「赋事行刑,必問於遺訓而咨於故實」 韋昭《注》:「遗訓,先王之教也」 위의 두 구는 純麗했던 위대한 덕이 있었으며 매우 훌륭하게 교화되어 전해져 내려왔음을 설명하고 있다.
 
3.  (以)陀(施)及子孫
 
「陀」 施로 읽는다. 고대엔 「它」에서 소리를 얻고 「也」에서도 소리를 얻었기에 자주 발음이 같은 자로 서로 빌려썼다. 張政烺은 「《尚書·君奭》 『在今予小子旦,非克有正,迪惟前人光,施于我沖子』 《後漢書·竇融傅》:昔魏其一言…修成淑德,施及子孫」 李賢은 「施」은 延이라고 밝혔다. 孫星衍《疏》 『惟道揚前人光美,延于我幼君而已』 영향을 끼치거나 미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같은 용례는 다음과 같다. 《詩·大雅·皇矣》:「既受帝沚,施于孫子」 《左傅·隱公元年》:「愛其母,施及莊公」 《國語·楚語下》:「子之仁,不忘子孫,施及楚國,敢不從子」
李斯의 《諫逐客書》:「使西事秦,功施到今」
 
4. 用隹(惟)朕所放
 
「隹」가 「惟」가 발어사로 사용되지 않고 문장 중간에 보인다. 이때는 ‘也’가 된다. 참고로 《經傅释詞·卷三》을 보면 이해하기 쉽다. 「放」 명문의 용례와 유사한 것을 보면서 이해하도록 한다. 베풀다 펼쳐보이다 《國語·周語下》:「宣之禮事,放上而動,咨也」 《國語·晋語四》:「君定王室而残其姻族,民将焉放?」 《國語·楚語下》:「四境盈壘,道殣相望,盗贼司目,民無所放」 다음의 두 구절 속의 「放」과 「循」은 평행구의 같은 위치에 놓이는데 두 글자의 뜻은 유사하다. 따를 수 있게 펼치다 《莊子·天道》:「夫子亦放德而行,循道而趨,已至矣」 따르도록 잘 펼쳐 안심이 되어 기대어 안심하는 의미로 까지 발전했다. 「依」의 의미까지 확대된 용례도 있다. 韋昭《注》:「放,依也」 한편 본받다는 의미도 있다. 《廣雅释詁三》:「放,效也」 《韩非子·說林下》:「鲁人拘管仲而效之,鮑叔言而相之」
 
5.  (慈)  (宽) 惠
 
「慈孝」 《國語·齊語》:「慈孝於父母」
「  惠」,  는  으로 읽으므로 즉 ‘缓’이다. 고대엔 「袁」에서 소리를 얻고 「爰」에서도 소리를 얻었기에 자주 발음이 같은 자로 서로 빌려썼다. 좌전과 국어에서 그 용례를 볼 수 있다. 《左传·僖公15年》:“晋于是乎作爰田”,《国语·晋语9》作“作辕田”. 사기에서는 缓은 和의 뜻이다. 《史記·樂書》:“嘽缓慢易” 宽惠:《國語·齊語》:「匠之不若夷吾者五:宽惠柔民,弗若也」 《國語·晋語一》:「吾聞申生甚好仁而疆,甚寬惠而慈於民,皆有所行之」 《國語·晋語八》:「夫君子寬惠以卹後,猶恐不濟」《墨子·非攻下》:「宽以惠,緩易急,民必移」 묵자에는 또 이런 용례도 있다. 「必務寬吾眾,信吾师,以此授諸侯之師,则天下無敵矣」 《韓非子·難二》:「今緩刑罰,行宽惠,是利姦邪而害善人也,此非所以為治也」 《韓詩外傅·卷四》:「父宽惠而有禮」 「宽惠」은 때로는 「宣惠」로 이해되었다. 그 용례는 다음과 같다. 《國語·晋語七》:「君知士貞子之帥志博聞而宣惠於教也,使為太傅」 「  惠」와 「宣惠」는 둘 다 똑같이 讀為「宽惠」로 읽는다. 문헌상에 또 「廣惠」라는 비슷한 예도 보인다. 《逸周書·文傅》:「吾厚德而廣惠」
 
6.  (舉)孯(賢)  (使)能
 
「  」  는 「犬」로 이루어졌고 「舉」로 읽는다. 「孯」은 「賢」의 이체자이다. 「  」는 「使」으로 읽는다. 「舉賢使能」과 아래 문장인 「進孯(賢)  (措)能」에서의 현은 서로 뜻이 통하며 「舉賢」 「使賢」 「進賢」 「措能」등 옛문헌에서 자주 보여진다. 그 용례는 매우 많다. 「使能」 는 고사성어 任賢使能와 통한다. 德行있는 이를 등용할 줄 아는 재능있는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다음과 같은 용례가 있다. 《荀子·王制》 「欲立功名,则莫若尚贤使能矣」 《荀子》 「明主尙賢使能而饗其盛」 漢. 王充의 《論衡·自然》 「舜、禹承安繼治,任賢使能,恭己無爲而天下治」 明· 羅貫中의 《三國演義·82회》 「吴主浮江萬艘,带甲百万,任賢使能,志存經略」 「使能」에 관한 것 중 「進賢」에 대해서 묵자에 거론된다. 《墨子·尚賢中》:「聖王甚尊尚賢而任使能,不黨父兄,不偏富贵,不嬖颜色. 賢者舉而上之,富而贵之,以為官長. 不肖者抑而廢之,贫而贱之,以為徒役」 현자로서 백성들에게 상을 권하고 벌을 두려워하게 하면 불초한 무리들이 적어질 것이다. 이를 「進賢」이라고 한다. 그 후에 성인의 말을 듣고 행동을 좇아 그 재능을 관찰해 살피면 관리다 되니 이를 「事(使)能」이라 한다. 위에서 인용한 묵자의 내용중 「進賢」의 「進」은 「勸進」의 뜻으로 본 명문과는 같지 않다.
 
7.  (以)輔相氒(厥)身 天不  (斁)其又(有)  (願)
 
「輔相」 임금을 도와 나라를 다스리는 일이다. 다음과 같이 옛문헌에 자주 등장한다. 《孟子·公孫丑上》:「相與輔相之」 《易·泰·象傅》:「輔相天地之宜,以左右民」 《國語·楚語上》:「且夫誦詩以輔相之」 《國語·楚語下》:「明王聖人能制議百物以輔相國家,则寶之」 《墨子·尚賢中》:「故士者所以為輔相承嗣也」
「  」은 「斁」으로 읽는다. 《詩周南·葛覃》:「服之無斁」 毛《傅》:「厭也」
「  (願)」:心으로 구성되고,元이 소리요소가 된다. 본 명문에서는 「願」 으로 읽는다. 설문에서는 贪으로 본다. 《說文·心部》:「忨,贪也. 從心,元聲」
 
8.  (使)  (得)孯(賢)在(士)良  (佐)賈
 
「  」는 「得」이다. 「賢士」에서 「在」는 「士」와 「才」로 구성되며 둘 다 소리요소가 된다. 중산왕착호 명문에서는 「才(材)」 혹은 「士」으로 읽는다.
「  」는 「佐」으로 읽는다. 「差」와 「左」로 구성되며 둘 다 소리요소가 된다. 國差  이란 기물에서 이 글자가 보여지는데 「國差」는 문헌에서 「國佐」가 된다. 國差  :「國差蒞事歲」 《墨子·尚賢》:「賢良之士…而社稷之佐也」 중산왕   호에서도 「又得賢佐司馬賈」로 그 용례를 찾아볼 수 있다.
 
9. 余智(知)其忠  (信)施(也),而  (專)賃(任)之邦
 
「智」는 「知」로 읽는다. 「  」와 「信」는 소리부분을 대체할 수 있는 이체자로 여겨진다. 「賃」:張政烺은 「專任」으로 읽었다. 중산왕  정 명문에는 「氏以寡人  (委)賃之邦,而去之遊」라는 구절이 있는데 여기의 「  賃」가 「  賃」와 서로 뜻이 통한다. 사기과 국책에서 「專委」이 의미상 연관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國策·魏策一》:「西河之政,專委之子矣」 《史記·王翦傅》:「今空秦國甲士而專委於我」
「專任」에 대해서 옛문헌에는 다음과 같은 용례가 있다. 《吕氏春秋·孟秋紀》:「專任有功,以征不羲」 《韓非子·難勢》:「雖然,夫释賢而專任势,足以為治乎? 」 다음은 蔡哲茂가 밝힌 용례이다. 《國策·燕策》:「於是燕王專任子之」 《燕策二》:「王欲醳臣任所善」 《戰國縱横家書》 蘇秦自齊獻書燕王章 「王若欲剸舍臣榑任所善」禮記·月令》:「專任有功,以征不羲」 《荀子·仲尼》:「主專任之,则拘守而詳」 《淮南子·道應》:「楚莊王專任孫叔敖而霸」 《後漢書·董卓傅》:「使專任軍政」
 
10. 氏(是)  (以)遊夕  (飲)飤(食)
 
「氏」는 「是」로 읽는다. 「遊夕」 고대 왕들이 봄 가을로 연중 두 차례 巡行하는 것이다.  「飲」의 이체자이다.
按:「遊夕」는 《管子戒》에서 보인다. :先王之遊也,春出原農事之不本(引者按:原文為「卒」)者謂之遊,秋出補人之不足者謂之夕」 또 다른 용례도 있다. 「先王有遊夕之業於人,無荒亡之行於身」 《孟子·梁惠王下》記载晏子封齊景公:「春省耕而補不足,秋省歛而助不給. 夏谚曰:吾王不遊,吾何以休?吾王不豫,吾何以助?一遊一豫,為諸侯度」 여기의 「豫」이 바로 「夕」이다. 안자춘추에서도 「豫」의 용례가 있다. 《晏子春秋 内篇問下》:「春省耕而補不足者位置遊,秋省實而助不給者謂之豫」
《國語·越語下》:「勾踐载稻與脂於舟以行,國之孺子之遊者,無不餔也,無不歠也,必問其名」《吕氏春秋·顺民》:「越王苦會稽之恥,欲深得民心…時出行路,從車载食,以視孤寡老弱之渍病,困窮颜色愁悴不赡者,必身自食之」
 
11.  (靡)又(有)  (遽)  (惕)
 
 :心으로 구성되었으며 皿은 소리부분이다. 張政烺은 명문에서는 「靡」혹은 「罔」으로 읽는다
  :「典籍作遽惕」 朱德熙 裘锡圭는 遽惕로 보았다. 《楚辭·大招》:「魂乎歸來,不遽惕只」 王逸《章句》:「言飲食醲美,安意遨遊,長無惶遽怵惕之憂也」 「遽惕」의 뜻이 「怵惕」과 통한다. 「惕」와 「悐」는 서로 통한다. 林宏明은 다음과 같은 용례를 들어 입증했다. 《孟子·公孫丑上》:皆有怵惕惻隱之心」 《國語·周語上》:「夫晋侯非嗣也,而得其位,亹亹怵惕,保任戒惧,犹曰未也」 《國語·齊語》:「教大成,定三革,隱五刃,朝服以濟河而無怵惕焉。」《國語周語上》:「 ...猶日怵惕,懼怨之來也」 韋昭《注》:「怵惕,恐懼也」 《睡虎地秦簡·為吏之道》:「术(怵)悐(惕)之心不可[不]長」 《漢書·藝文志》方技家神僊之術其叙云:「 ...而無怵惕於胸中」 《漢書·王商傅》:「於是退勃使就國,卒無怵悐憂。」《漢書·淮南厲王傅》:「日夜怵惕,修身正行」,均其例.
 
【해석】
唯十四年,中山王  命相邦賈,擇燕吉金,鑄為彝壺,節於禋齊. 可法可尚常,以饗上帝,以祀先王. 穆穆濟濟,嚴敬不敢怠荒,因載所美,昭則皇功,詆燕之訛,以儆嗣王.
 
14년(연나라 내란 평정후), 중산왕 착은 신하인 司馬賙에게 명을 내려 연나라 최고의 금을 선별하여 청동예기(중산왕착호)를 제작하게 하고 경건하게 하늘에 제를 올리게 했다. (이 기물을) 법으로 삼고 그 의미를 늘 간직하여 상제와 선조에게 제사를 지내도록 한다. 거룩하고 거룩하도다! (전해진 의미가) 너무나 공경스러워 감히 (政事를) 게을리 하지 못할지니 훌륭한 업적을 소중히 간직하고 왕의 공을 밝히며 燕이 저지른 과오를 경계로 삼아 앞으로 왕위를 잘 이어나가야 할지어다.
 
唯朕皇祖文武桓祖成考,寔有純德遺訓,以施及子孫,用唯朕所放. 慈孝寬惠,舉賢使能. 天不斁其有願,使得賢士良佐賈,以輔相厥身. 余知其忠信也,而專任之邦. 是以遊夕飲食,靡有遽惕.
 
짐이 선왕이신 文公 武公 桓公과 成王을 생각해볼진대 참으로 큰 덕과 훌륭한 가르침을 유구히 전해주었다. 이 가르침을 자손들에게 미쳐 시행하게 하였다. 이제는 짐이 그 가르침을 펼쳐보려 하노라. 자애 효성 관용 은혜로운 성현을 등용할 줄 아는 이를 천거하라. 하늘 또한 그 기원을 탓하지 않을지니 司馬賙를 도울만한 성현을 구해서 나라의 안위를 잘 지킬 수 있게 하라. 짐이 그 忠과 信을 알고 변함없이 나라를 믿고 맡길 수 있다면 매년 巡行할 때 갑자기 두려워지게 되는 것이 적어질 지어다.
 
【북방 장식서체의 미감】
 
청동기명문의 장식서체의 변천을 파악할 수 있다. 중산명문의 아래로 시원스럽게 쭉 내려뻗은 세로획이 특색이 있다. 가로획이 만나지 않는 모습도 자주 등장한다. 中山王鼎에서는 ‘之’ 자가 많이 보이는데 바로 이 ‘之’ 자가 세로획의 수필들이 가로획과 만나지 않는 자형의 전형적인 예이다. 이렇게 획끼리 만나지 않게 되자 세로획 수필의 뾰족함을 들어내게 되었다. 이런 부분들이 모여 북쪽지역 전국시대 문자의 특징인 剛峭한 미감이 돋보이게 된다. 그래서 험준하고 웅장하며 힘이 넘치는 강인한 느낌을 준다. 아울러 남방명문처럼 꼬불꼬불하게 굴리는 맛이 아니라 쭉쭉 뻗치는 필세가 독특하다. 이러한 필치와 획 자체의 힘 있는 모습이 결합되어 더없이 강한 힘의 미감을 주고 있다. 획 속에서는 새겨지는 방식으로 인해 마찰감이 느껴져 더욱 그 힘을 돋보이게 하고 있다. 중산국명문은 균형을 잘 맞추고 있다. 지나치게 화려하지도 그렇다고 엄정하기만 하지도 않다. 마찰감에서는 속도의 빠름과 느림의 조화, 리듬감에서는 한 획 속에서의 지나치게 굵거나 가늘지 않은 제안의 원리를 잘 지키고 있다. 이런 명문의 특성은 중원문화를 받아들이면서 자신의 독특한 문화도 잘 지켜온 中山人들의 조화로운 삶과 문화에서 우러져 나온 것으로 보여진다.
 
 
【참고문헌】
河北省文物管理处, 《河北平山县战国时期中山国墓葬发掘报告》, 文物, 1979(1).
朱德熙 裘锡圭, 《平山中山王墓铜器铭文的初步研究》, 文物, 1979(1).
李学勤 李零, 《平山三器与中山国史的若干问题》,载《考古学报》,1979(2).
李学勤, 《谈近年新发现的几种战国文字资料》,载《文物》,1956(1).
李学勤, 《战国题铭概述》文物, 1959(9).
林宏明, 《战国中山国文字研究》,博士学位论文,台湾古籍出版社,2003.
于豪亮, 《古玺考释》,载《于豪亮学术文存》, pp.8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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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三
 
賈渴(竭)志盡忠,(以)(佐)右氒(厥)闢(辟),不腻(贰)其心,受赁(任)  (佐)邦,夙夜篚(匪)解(懈),進孯(賢)  (措)能,亡(無)又(有)  息,  (以)朙闢(辟)光。
 
【注】賈渴(竭)志盡忠
渴:《說文·水部》:「渴,盡也。」今用為「竭」。《韓非子·姦劫弑臣》:「今為臣盡力以致功,竭智以陳忠者。」又「我不去姦私之行盡力竭智以事主...」;《韓非子·飾邪》篇既有「故先王賢佐盡力竭智」也有「盡智竭力」。《吕氏春秋任地》:「知贫富利器,皆時至而作,渴時而止。」「渴」讀為「竭」。银雀山漢簡:「水渴者其魚涸」亦借「渴」為「竭」
古書有「竭智盡忠」(《楚辭·卜居》等)、有「竭力盡忠」(《淮南子·主術》)、有「竭誠盡忠」(《史記·鄒陽列傅》)。
【注】  (以)  (佐)右氒(厥)(辟),不腻(贰)其心
 :讀為「左」(詳上文),中山王  鼎铭有:「以左右寡人。」「左右」和上文「辅相」均為輔佐之意。《易·泰·象傅》:「辅相天地之宜,以左右民。」《晋公 》:「左右武王」、《同簋》:「左右吴大父。」
闢:讀為「辟」,《詩·大雅·棫樸 》:「濟濟辟王,左右趣之。」鄭《箋》:「辟,君也。」
腻:讀為「贰」。帛書《五行篇》經二六引《詩·大雅·大明》,「贰」字亦作「腻」(蔡哲茂《集释上》)。《國語·周語下》:「成事不贰」韋昭注:「贰,變也。」
【注】受賃(任)  (佐)邦,夙夜篚(匪)解(懈)
賃:讀為「任」:「篚」,讀為「匪」;「解」,讀為「懈」,詳「中山王  鼎铭文释文·夙夜不懈」
【注】進孯(賢)  (措)能
 :讀為「措」,《說文》:「措,置也。」《國語·齊語》:「是故鄉長退而修德進賢」,「進孯(賢)  (措)能」和「 (舉)孯(賢)  (使)能」意近,参上文。
第四
 
 (適)曹(遭)郾(燕)君子徻(噲),不  (顧)大宜(羲),不  (就)者(諸)侯,而臣  (主)  (易)立(位),  (以)内  (絕)邵(召)公之業,乏(废)其先王之祭祀,外之,则  (将)  (使)  (上)勤(觐)於天子之庿(廟),而退舆者(諸)侯齒(長)於  (會)同,则  (上)逆於天,下不  (顺)於人施(也)。  (寡)人非之。
 
【注】  (適)曹(遭)郾(燕)君子徻(噲)
 曹:讀為「適遭」,有的學者讀為「敵曹」,不確。银雀山漢簡:「柏常騫出,曹晏子於途。」「曹」讀為「遭」。《   壺》铭文中敘述同一件事講到「逢燕無道」,這裡用「逢」字,可以知道《中山王  壺》铭此句讀為「適遭」比较合理。而且古書常有此用法,如:《莊子·應帝王》:「天根遊於殷陽,至蓼水之上,適遭無名人而問焉。」《莊子·在宥》:「雲将東遊,過扶摇之枝而適遭鴻蒙。」《莊子·知北遊》:「而適遭無為謂焉」。
 
 
【注】不  (顧)大宜(羲),不  (就)者(諸)侯
 :「顧」為「  」字加注「户」聲之異體。「不顧」一辭古書常見。(例詳蔡哲茂《集释上》)
 :1.朱德熙、裘锡圭《初研》讀為「救」。2.李學勤、李零《問題》讀為「告」。
3.于豪亮《于释》讀為「友」。 4.張政烺《考释》讀為「忌」。 5.徐中舒、伍士谦《說明》讀為「謀」。 6.張克忠《簡释》讀為「就」,意為不成其為諸侯。黄盛璋《研究》認為「就」是依就、依靠、親近之意。蔡哲茂《集释上》補充:「《廣雅·释詁三》「就,久也。」故「 」可讀為「就」。」
7.小南一郎《中山王陵三器铭文的時代背景》讀為「求」,並舉《左傅·僖公二十五年》:「求諸侯,莫如勤王。」<墨子·非攻下》:「我欲以羲名立於天下、以德求諸侯。」為證,指不求諸侯為諸侯間結盟關係的破壞。
按:文献有「不友諸侯」,《韓非子·外储說右上》:「吾不臣天子,不友諸侯。」又云:「彼不臣天子者,是望不得而臣也;不友諸侯者,是望不得而使也。」《吕氏春秋·士節》:「此齊國之賢者也,其羲不臣乎天子,不友乎諸侯,於利不苟取,於害不苟免。」《韩詩外傅·卷一》:「天子不得而臣也,諸侯不得友也。」又《國語·晋語四》:「若不納,秦将納之,则失周矣,何以求諸侯?」韋昭《注》:「無以為諸侯盟主。」在铭文中讀為何字為此铭本意,不能判断,存之待考。
【注】而臣  (主)  (易)立(位)
 :讀為「主」。「臣主易位」即指下文的「為人臣而反臣其主」及《   壺》的:「子之大僻不羲反臣其主」。
 :為「易」字疊加形體並上下颠倒的異體。這是「臣主易位」乃是在說明君臣上下颠倒,因而将動詞「  (易)」字作形體重複的上下颠倒。
立:讀為「位」。「易位」古書常見,如:《孟子萬章上》:「君有大過则諫,反覆之而不聽则易位。」《韩非子·安危》:「而況敢易位乎」《韓非子·說疑》:「轉法易位」《韓非子·備内》:「偏借其權勢則上下易位矣,此言人臣之不可借權势也。」《韓非子·外储說左下》:「夫瑟以小絃為大聲,以大絃為小聲,是大小易序,贵贱易位,儒者以為害羲,故不鼓也。」此因瑟有以「小絃属大聲,以大絃属小聲」的特性,而儒者因其特性和「大小易序,贵贱易位」類似,所以不鼓瑟,以表明自己對「大小易序,贵贱易位,以妨害羲」不赞同的立埸。铭文以臣主易位是不顧大羲,是與儒的立論同。小南一郎(中山王陵三器铭文的時代背景)指出《馬王堆帛書·經法》有「君臣易位,謂之逆;賢不肯并立,謂之亂。」
 
【注】  (以)内  (絕)邵(召)公之業
 :古文「絕」;《漢書·路溫書傳》:「  者不可續」,敦煌本《尚書·商書》甲卷(西伯戡黎)「惟王淫戲用自  」。
邵:即「召」加「邑」旁的專用字。
業:《爾雅·釋詁》:「業,緒也。」《詩·鲁颂·閟宮》:「纘禹之緒」,毛《傅》:「緒,業也。」《國語·楚語下》:「使寡君無忘先王之業」、「以復先王之業者,夫子也。」(蔡哲茂《集释上》)
【注】乏(废)其先王之祭祀
乏:讀為「廢」。《莊子·天地》:「子往矣,無乏吾事。」《释文》:「乏,废也。」「乏祀」一辭古書常見:《國語·鲁語上》記载臧文仲告糴於齊曰:「天災流行…大懼乏周公、太公之命祀。」《國語·周語上》:「今天子欲修先王之緒而棄其大功,匮神乏祀而困民之财,将何以求福用民?」《國語·楚語下》:「縱臣而得全其首领以没,懼子孫之以梁之險,而乏臣之祀也。」《左傅「僖公十年》:「且民何罪,失刑乏祀。」《左傅·襄公十四年》:「匮神乏祀,百姓絕望。」「乏祀」又作「廢祀」, 如《左傅「昭公二十七年》:「苟先君無廢祀」《左傅·定公四年》:「滅宗廢祀,非孝也。」《國語·晋語一》:「而其世不廢(,)祀至於今。」《國語·晋語七》:「其學不廢其先人之職。」《禮記·曲禮》:「凡祭,有其廢之,莫敢舉也;有其舉之,莫敢廢也。」《禮記·曲禮》:「以畜牲則废祀」。
(参见蔡哲茂《集释上》)
【注】外之,则  (将)  (使)  (上)勤(觐)於天子之庿(廟)
 :《說文》「  」字古文,讀為「将」;
 :即「上」字疊加聲旁「尚」的異體。
勤:讀為「觐」,《說文》「觐,諸侯秋朝日觐,勤劳王事也。」《周
禮·大宗伯》鄭《注》:「觐之言勤也,欲其勤王事也。」
庿:為「廟」字代换聲旁的異體。《儀禮·觐禮》,《释文》「秋見曰觐,一受之于庿,殺氣質也…觐者,位于庿門外而序入。」(参见蔡哲茂《集释上》)
【注】而退舆者(諸)侯  (長)於  (會)同
退:《禮記·少儀》:「朝廷曰退」《疏》:「謂於朝廷之中,若欲散還則稱曰退。」
:《吕氏春秋·直諫》:「不榖免衣(於)繦緥而齒於諸侯,願請變更而無笞。」高注:「齒,列也。」
 :「長」字異體。
 :讀為「會」,「會同」《周禮·大宗伯》:「時見曰會,殷见曰同。」《周禮·大行人》:「時會以四方之禁,殷同以施天下之政。」鄭玄注:「殷同即殷見也。王十二歲一巡守,若不巡守,则殷同。殷同者,六服盡朝。既朝,王亦命為壇於國外, 合諸侯而命其政。」
【注】则  (上)逆於天,下不  (顺)於人施(也)。  (寡)人非之。
 :讀為「顺」,長沙楚帛書「大不訓于邦」訓亦讀為顺。
 :乃「寡」字省「宀」之異體。《國語·越語下》:「此逆於天而不和於人。」語與此相似。
 
 
第五
 
贾曰:「為人臣而  (反)臣其  (主),不祥莫大焉。  (将)與  (吾)君並立於  (世),齒  (長)於  (會)同,则臣不忍见施(也)。贾  (願)  (從)在(士)夫=(大夫),  (以)請(靖)郾(燕)疆。」氏(是)  (以)身蒙  (甲)胄,以  (誅)不  (顺)。
 
【注】贾曰:「為人臣而  (反)臣其  (主),不祥莫大焉。
 :讀為「反」。按:「不祥莫大焉」古書常見:《吕氏春秋·淫辭》:「言行相詭,不祥莫大焉。」《吕氏春秋·謹聽》:「不深知賢者之所言「不祥莫大焉。」《吕氏春秋·召類》:「治而攻之,不祥莫大焉;乱而弗討,害民莫長焉。」《韩詩外傅·卷 六》:「二者不可,然且為之,不祥莫大焉。」
【注】  (将)與  (吾)君並立於  (世),齒  (長)於  (會)同
 :讀為「吾」;
立:讀為原字,非「位」。上引《馬王堆帛書·經法》有「君臣易位,謂之逆;賢不肖并立, 謂之亂。」「并立」即「並立」,中山國「位」一體作「立」。
 :讀為「世」,中山王  鼎铭:「及参  無不赦」;   壺「   勿廢」借「  」為「世」。
【注】则臣不忍见施(也)
按:《公羊傅·莊公二十七年》:「坐而视之,则親親因不忍见也。」
(蔡哲茂《集释上》)
 
 
 
 
【注】贾  (願)  (從)在(士)夫=(大夫),  (以)請(靖)郾(燕)疆。
 :「從」字異體;
在:讀為「士」;「士大夫」古書常見,如《荀子•大略》:「倍畔之子,明君不内朝,士大夫遇諸塗,不與言。」
請:讀為「靖」,《廣雅·释詁》:「靖,安也。」按:《呂氏春秋·似顺》:「完子請率士大夫以逆越師。」此句和铭文「贾願從士大夫以靖燕疆」句法相似。
 
 
하북성 평산현 1호묘에서 출토된 중산왕방호의 명문 중 “赒愿从大夫,以请(靖)郾(燕)疆”부분에서 从다음의 글자를 “才와 士”로 보고 있다. 朱德熙 裘锡圭는 “才”로 고석하고“在”로 읽고 있으며 河北省文物管理处에서는 바로 在로 해석했고 李学勤 李零는 “在”로 고석하고 “士”로 읽고 있다. 이 세 가지 說은 글자를 이해하는 데는 크게 다름이 없으나 读法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이에 대해 徐海斌 陈爱和는 세 가지 근거를 들어“士”로 읽는 것이 정확하다고 주장했다.
첫째 중산삼기 명문을 검사해보면 보편적으로 “在”가 놓여질 곳에 “才”로 대신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中山王方壺의“夫古之圣王,务才(在)得贤,其次得民”부분과 大鼎의 “(燕君子哙)犹迷惑于子之而亡其邦,为天下戮,而况才(在)少君乎?”과 大鼎의 “邻邦难亲,仇人才(在)旁”이 있다.
 
둘째 고대의 음을 살펴보면 “才”와“士”둘 다 纽의 부분에서 나온 글자로 그 음이 매우 가깝다. “才”는 당시 “士”위에 더해진 声符가 되었다. 중산삼기명문에서는 성부가 더해지는 현상이 습관적으로 많이 보였다. 예를 들면“立”위에“胃”를 더한 것,“乎”와“吾”위에“虎”를 더한 것,“世”위에“歹”를 더한 것,“上”위에“尚”을 더한 것 등이 있다.
 
셋째 “ ”을“在”로 읽게 된다면 문장의 의미가 매우 불명확해진다. 어떤 학자는 그 해석이 중산의 특유한 어법현상을 대변한다고 하지만 너무 끌어다 맞춘 듯하다. 문장이 순조롭기도 할 뿐만 아니라 “士大夫”는 선진문헌중에서 적지 않게 출현하고 있어 “士”로 읽는 것이 좋아 보인다. 그 예는 다음과 같다.(小臣)掌士大夫之吊劳,凡大事,佐大仆。(《周礼·夏官·小臣》)士大夫则奠挚再拜稽首,君答一拜。(《仪礼·士相见礼》)士大夫倦于听治,息于竽瑟之乐。(《墨子·三辩》)
 
여기서 우리는 중산국의 尊賢重士 전통적 사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사대부 계층이 당시에 중원의 여러 제후국에서 굴기했을 뿐만 아니라 변방의 나라에까지 활약하기 시작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11)  (願)從在大夫
于豪亮先生说,“在大夫”,在读为士(同为之部字)。林宏明考释上,把原文记载的很清楚,“  (願)從(从)在(士)夫=(大夫)。”笔者在这里,因为“在”字和“夫”字解读的困难,看林宏明考释之后,才了解士大夫的原文。此外,笔者认为,在战国中山国铭文出现士大夫的记载是非常重要的。战国晚期,是启发理性的变动时期。在这时刻,有能量的新阶层的出现,人们的审美观也有一定的改变。士大夫的审美观是以先秦儒家兼济天下的使命感代表的,所以可以说士大夫的使命感表现战国中山国生命意志与意识,关于士大夫的内容,在第四章详细的阐述。
 
a 在(士)
从古音上看,“才”、“士”皆为从纽之部字,其音极近将“  ”读作“在”,文意甚觉不畅,有学者将其解释为中山特有的语法现象。综上所述,我们以为,中山王方壶铭文“赒愿从大夫”当读为“赒愿从士大夫”,“从”字使动,“士大夫”为宾语。
b. 夫“=”(大夫)
属于表示文字的重复而加两横为饰的特殊“两横(=)”。重复而加两横为饰的基本普遍的位置不同,位置不在文字右侧下边,而在于字的中间。也不表示重复“大”字的意思,而表示与“大”字形体相似的“夫”字。关于“两横(=)”的性质与美感,在第四章详细的阐述。于豪亮先生,针对中山三器制作时期考释说:
“上面三器,中山王  鼎和中山王  壶都作于中山王  十四年,是同时的作品,   壶则是  死后他的儿子为纪念他而作的,故   壶的年代稍晚。”
 
图1-78 “公”
公朱左官鼎铭
 
1-79“朱”
公朱左官鼎铭
 
关于中山三器制作时期,段连勤先生,在北狄族与中山国大事年表续表十一:
公元前315年,中山王  铸   壶。公元前314年,中山王  命相邦司马赒率三军之众,平燕内乱,辟启封疆数百里,列成数十座。又命司马赒采燕吉金,铸鼎、方壶,献俘宗庙,祭祀天地祖先,并可刻铭与鼎、壶。公元前308年,王  死,   即位,并刻悼词于   壶。
据上述,   壶器物制作的时间和契刻的时期是不一致。   壶比中山王  鼎、壶早制作一年,但当时器物上没有契刻铭文。而中山王  鼎、壶铸成后便契刻上了铭文。于此不同,   壶器物铸后八年,才将铭文契刻上去。由此,笔者判断青铜器的硬度不是特别硬。太硬的话,需要使用凿刻的镌刻技法。
由此得知,纤细而刚劲的线条的产生的背景。契刻的方式与铸铭相比更为方便,在文化交流频繁的北方地区,三晋周边出现了相似的线条。产生了以具有刚劲有力的垂直线为主的“赵孟介壶”的线条,以纤细而劲健的线条为主的“公朱左官鼎”。 关于纤细而刚劲的线条美感,即将在在第四章详细的说明。
 
 
于豪亮:《中山三器铭文考释》,载《考古学报》,1979年第二期。
 
林宏明:《战国中山国文字研究》,博士学位论文,台湾古籍出版社,2003年,第240-241页。
 
马承源:《商周青铜器铭文选》,第四卷第八八一篇,文物出版社,1986年。
黄盛璋:《中山国铭刻在古文字、语言上若干研究》,载《古文字研究》第七辑,中华书局,1982年。
 
参照徐海斌、陈爱和:《中山王方壶铭文“愿从士大夫”的释读及相关问题》,载《井冈山学院学报》,2009年第九期。
 
于豪亮:《中山三器铭文考释》,载《考古学报》,1979年第二期。
段连勤:《北狄族与中山国》,广西师范大学出版社,2007年3月,第162页。
 
 
 
 
 
 
 
 
【注】氏(是)  (以)身蒙  (甲)胄,以  (誅)不  (顺)
 :讀為「甲」。「  」字甲骨文作「  」等形,即桎梏之「梏」的表意初文。「  」字及楚簡「  」,庚壺「  」字,「其羲同「甲」張政烺先生讀為「介」「于豪亮先生讀為「甲」…「介」、「甲」是同源詞,乃一聲之轉,認為可以根據「  」、「  」、「  」等字在古文字資料中跟其他的字所構成的不同的詞,按照古人的語言習慣作不同的讀法,不必强求一致。根據古書中有「甲裳」一詞(见《吕氏春秋·去尤》等),仰天湖39虢简的「  衣」可以讀為「甲衣」:根據古書中既有「甲胄」一詞(見《左傅》文公十三年等),又有「介胄」一詞(见《管子•小匡》等),平山中山王壺的「  胄」不妨兩讀。」《國語·晋語六》有「閒蒙甲胄」。
 
 :即「誅」字。《集韻》引《廣雅》云:「  ,殺也。」(蔡哲茂《集释上》)。
按:從「寡人非之」至「以  (誅)不  (顺)」,用「非」、「誅」二字,《莊子·胠箧 》:「故田成子有乎盗贼之名,而身處尧舜之安。小國不敢非,大國不敢誅。」「  (誅)」為行動的誅殺:「非」為言語上誅责。又《墨子•非攻下》對「攻」和「誅」有所區别,可以参見。
 
第六
 
郾(燕)  (故)君子徻(噲),新君子之,不用  (禮)宜(羲),不  (顧)逆  (顺),  (故)邦  (亡)身死,曾亡(無)  (一)夫之  (救)。述(遂)定君臣之  (位),上下之軆(體),休又(有)成工(功),  (创)  (闢)  (封)彊(疆)。天子不忘其又(有)勛,  (使)其老  (策)賞仲父,者(諸)侯  (皆)賀。
 
【注】郾(燕)  (故)君子徻(噲),新君子之
 :讀為「故」。
【注】不用  (禮)宜(羲),不  (顧)逆  (顺) :讀為「禮」。
宜:讀為「羲」。《孟子·盡心下》:「無禮義則上下亂。」
 
【注】  (故)邦  (亡)身死
 :讀為「亡」,按:「邦亡身死」古書常見:這裡舉二例和晋有關的例子「《韓非子·喻老》:「虞君欲屈產之乘,與垂棘之璧,不聽宫之奇,故邦亡身死。」同篇又有「簡公失之於田成,晋公失之於六卿,而邦亡身死。」
 
【注】曾亡(無)  (一)夫之  (救)
一夫:《左傅「莊公十二年》:「得一夫而失一國,與惡而棄好,非谋也。」《孟子「梁惠王》:「残贼之人,謂之一夫。聞誅一夫紂矣,未聞弑君也。」
 
 :即「救」字異體。
【注】述(遂)定君臣之  (位),上下之軆(體)
述:讀為「遂」,羲同「就」、「於是」。從「术」得聲之字和從「  」得聲之字常可互相借用。古文字中的例子,如盂鼎:「我聞殷述命」,「述」讀為「墜」,《尚書•酒誥》:「今惟殷墜厥命」、《尚書•君 》:「殷既墜厥命」;又有「乃其隧命」亦见《尚書•君奭》、《春秋•僖公》:「公子遂」,三體石經以「述」為「隧」(《石刻篆文编》14·12) 、「遂」(同上2·24) 。《說文•亘部》「遂」字古文作「述」(稍讹)。古書中的例子極夥,如:《禮記•月令》:「 端以術」,鄭玄《注》:「術,《周禮》作遂。」;《吕氏春秋•辨土》:「衡行必得,縱行必術。」俞樾《諸子平議》:「術讀為遂。《春秋·文十二年》:『秦伯使術來聘』《左》、《榖》並同《公羊》作『遂』。《禮記·學記》:『術有序』,鄭《注》曰:『術當爲遂。』是術、遂古通用。」;《墨子·備城門》:「衝術」後文作「隊」;《史記·鲁周公世家》:「東門遂」,司属貞《索隱》:「《系本》作述,鄒诞本作秫。」。
 
 :即是在「立(位)」字上加注「胃」聲的異體:
軆:即「體」字異體。《韩非子·難一》:「今师曠非平公之行,不陳人臣之諫,而行人主之誅,舉琴而親其體,是逆上下之位,而失人臣之禮也。」同書:「仁羲者,不失人臣之禮,不败君臣之位者也。」《禮記·曲禮上》:「君臣上下,父子兄弟,非禮不定。」
 
【注】休又(有)成工(功)
休:《尔雅•释诂》:「美也。」
又:讀為「有」,《詩•周颂·载见》:「休有烈光」,鄭《箋》:「休者,休然盛壯。」
工:讀為「功」「《尚書•禹贡》:「告厥成功。」《國語·吴語》:是以無成功。」「休有成功」猶言「休又(有)成事」(史颂簋)、「休厥成事」、「休既又(有)工」(师害簋)、「休有成慶」(蔡侯鐘)。《論語·泰伯》:「子日:「大哉!尧之為君也!…巍巍乎,其有成功也。「」
【注】  (创)  (闢)  (封)彊(疆)。
 :讀為「創」。
 :為「闢」字異體。
 :為「封」字異體。
彊:讀為「疆」「「封疆」一辭古書常見:《左傅 成公三年》:「帥偏师以脩封疆。」《孟子·公孫丑》:「域民不以封疆之界。」《荀子子道》:「封疆不削。」(蔡哲茂《集释上》)《國語•晋語一》:「君之倉廪固不實,又恐削封疆。」《國語•晋語一》:「四鄰服,封疆信。」《國語·齊語》:「審吾疆埸「而反其侵地,正其封疆,無受其资。韋昭《注》:「積土為封。」
【注】天子不忘其又(有)勛,  (使)其老  (策)賞仲父
勛:「勳」字古文,《說文》:「能成王功也。」
老:《左傅•昭公十三年》:「天子之老請帥王赋。」杜预《注》:「天子大夫稱老。」《論語•憲问》:「子曰:孟公綽為趙魏老则優,不可以為滕薛大夫。」则諸侯大夫亦可稱老。
  :「策」字異體。
仲:作「中,和中山國的「中」作「 」不同,應直接释為「仲」。
按:當時周天子的王畿雖然「地不大於曹、滕,人不眾於邾莒。」(《戰國策》),不過已經「實亡」的周王室在維護其天子之位時,封於諸侯國的策封之禮,恐怕也是希望多多益善,以「名存」天下吧!諸侯國亦利用周天子以壯聲勢、以正其名。《吕氏春秋·下賢》記載魏「文侯可謂好禮士矣,好禮士故南勝荆於連隄;束勝齊於長城,虜齊侯,獻諸天子,天子賞文侯以上卿。」
【注】者(諸)侯(皆)賀。
 :讀為「皆」。文献上「諸侯皆贺」常见,如:《左傅·莊公十年》:「及其入也,諸侯皆贺。」;《戰國策·趙策》:「秦攻魏取寧邑,諸侯皆贺。」;《戰國策·趙策》:「大王廣地寧邑,諸侯皆贺。」;《戰國策·秦策》:「諸士大夫皆贺,子獨不贺,何也?」。
 
第七
夫古之聖王敄(務)才(在)  (得)孯(賢),其即(次)  (得)民。  (故)  (辭)  (禮)敬則孯(賢)人至,   (愛)深則孯(賢)人  (親),  (籍)斂中则庶民  (附)。於(嗚)虖(呼),允  (哉)若言!明  之于壺而峕(時)觀焉。
 
【注】夫古之聖王敄(務)才(在)  (得)孯(賢)
孜:讀為「務」;
才:讀為「在」,「務在」常见:银雀山漢墓《孫臏兵法·延氣》:「復徒合軍,務在延氣」《吕氏春秋·自知》:「存亡安危,勿求於外,務在自知。」《漢書·兒寬傳》:「卑體下士,務在得眾。」
 
 
【注】其即(次)  (得)民
即:讀為「次」。 從「次」聲和從「即」聲可相通:《說文·土部》「垐」,古文作「堲」。《尚書·康誥》:「勿庸以次汝」《荀子·宥坐》「次」作「即」。《孟子·離婁上》:「得其民,斯得天下矣。」
【注】  (故)  (辭)  (禮)敬則孯(賢)人至
 :讀為「故」。
 :讀為「辭」。
 :讀為「禮l,同上。
【注】   (愛)深則孯(賢)人  (親)
 :即「爱」字:
 :讀為「親」。
【注】(籍)斂中则庶民  (附)
「  」:讀為「籍」。從「乍」得聲和從「昔」得聲之字可相通:银雀山漢簡《晏子》:「厚耤(籍)斂,急使令,正(政)無以和民」。《戰國策·齊策四》:「昔先君桓公所好者,九合諸侯,一匡天下,天子受籍,立為太伯。」孫治讓曰:「‘籍’ 當讀為‘胙’,指《左僖九年》王使宰孔赐齊侯胙事。」孫治讓曰:籍當讀為胙,指《左·僖九年》王使宰孔赐齊侯胙事。《戰國策·趙策一》:「昔者,五國之王嘗合横而谋伐趙,参分趙國壤地「著之盤盂,屬之柞。」繆文遠《戰國策新校注》:「「讎柞」帛書作「「祝諎(籍)」《說文·矛部》「矠」:「從矛,昔聲,讀若笮。」《說文·齒部》「齰」字重文作「齚」,银雀山漢簡「作人则君将失其威。」「借」作「作」;「公組色太息」「作」作「組」 。
 
 
按:「  (辭)  (禮)敬則孯(賢)人至」、「   (愛)深則孯(賢)人  (親)」、「  (籍)斂中则庶民  (附)」三句的句式可以分析為:
辭禮敬 則 賢人 至
 愛深 则 賢人 親
 斂中 则 庶民 附
「辭禮敬」、「  斂中」和「  愛深」應進一步分析。從「  斂中(適中)」和「  愛深」可知「辭禮敬」不宜解释作「 言辭(名詞)要有禮貌(形容詞)、有敬意(形容詞)」或「用辭(動詞)要有禮貌(形容詞)、有敬意(形容辭)」。也就是說在此「禮敬」不能是一個詞。
 
辭禮 敬 則 賢人 至
 愛 深 则 賢人 親
 斂 中 则 庶民 附
 
「  愛」的「  」目前不能確解,「  斂」的「  」则有讀為「籍」,視為動詞及讀為「作」,羲為「力役」視為名詞的不同意見,如果不把「辭」和「禮」視為兩個名詞,「辭禮」二字似乎没有其他更好的解释。「辭」和「禮」是兩個名詞,那麽「  」和「斂」也當如此,有的學者把「  」視為「力役之征」,「敛」表示「租赋,為布粟之征」似乎也颇合適。「作」大概就是《詩·鄘風·定之方中》所敘述「作于楚宫」、作于楚室」之類修築宫室等的勞役。《國語·越語下》有「卑辭尊禮」,又有「使者往而復來,辭愈卑,禮愈尊,王又欲许之。」這裡的「辭」和「禮」也是兩個相提的名詞。基於「辭禮敬则賢人至」和「  斂中则庶民附」两句的分析,可以知道有的學者把「  」讀作「布」就有待商榷了。因為「辭禮敬」是「辭敬」和「禮敬」:「  斂中」是「  中」和「斂中」,而「布爱深」不能說是「布深」和「爱深」。「  」的釋讀可以從這個角度來考虑,必须可以分為「  深」和「爱深」才對,《韩非子·外储說右下》有「今王信爱子之,将傅國子之…」,7 爱」當是和「信爱」類似。當然以上的討論是把「辭禮敬则賢人至」、「  爱深則賢人親」、「  斂中则庶民附」三句視為字的詞性是平行的為前提,這個前提未必成立,但可以提供一個考虑的方向。《禮記·學記》:「刑罰中故庶民安。」句式也和此類似,也是「刑中」和「 罰中」。此外,《墨子》書中有相關资料如下:
 
 
(l)(以其常)役,修其城郭,则民勞而不傷:以其常正(征),收其租税,则民費而不病。民所苦者非此也,苦於厚作敛於百姓…。(《墨子·辭過》)
(2)厚作斂於百姓,以為美食芻豢蒸炙魚鱉。大國累百器,小國累十器…(《墨子·辭過》)
(3)當今之主,其為舟車與此異矣,金固轻利皆已具,必厚作斂於百姓…(《墨子·辭過》)
(4)今天下為政者,其所以寡人之道多,其使民勞,其籍敛厚…(《墨子·節用上》)
 
 
(1)一(3)「厚作敛」文羲上似如黄盛璋先生所言是兼「作」和「斂」兩種:而(4)前一句「其使民勞」,後一句是「其籍敛厚」,似乎是前指力役之征;後指财货之征,如此则這裡的「籍敛」可能要讀為「租斂」。
 
【注】於(嗚)虖(呼),允  (哉)若言!明  之于壺而峕(時)觀焉。
允:《說文》「允,信也。」又《爾雅·釋詁》:「允,誠也。」
 :「兹」字加注「才」聲的異體字,铭文中讀為「哉」。《詩·下武》:「昭兹來許」,《後漢書·祭祀志》:注载謝沈書引作「昭哉来御」,此  讀為哉之證。(于豪亮《于释》)
峕:和「時」字為聲符繁簡不同的異體。
 
第八
 
【注】祗=(祗祗)翼,邵(昭)告後嗣
祗祗:《廣雅-释訓》:「祗祗,敬也。」
 
翼:《詩·六月》:「有嚴有翼。」毛《傅》:「嚴,威嚴也。翼,敬也。」虢叔旅鐘铭:「嚴在上,翼在下。」(《集成》二三八),此壺铭前有「穆穆濟濟嚴敬不敢怠荒」,可證「翼」訓為「敬」。有的學者認為铭文「翼」字下少刻了重文符虢「= 」, 《廣雅·释訓》:「翼翼,敬也。」或有可能。或释此字為「冀」则不可從。
邵:讀為「昭」,和   壺「明易告」同羲。《國語·晋語》:「敢昭告於皇祖文王」,韋昭《注》:「昭,明也。」
【注】隹(唯)逆生禍,隹(唯)  (順>生福
《荀子·天論》:「顺其類者謂之福,逆其類者謂之祸。」
【注】  (载)之  (簡)  (策),  (以)戒嗣王
 :和「簡」為代换聲旁之異體。上文有「以敬嗣王」。
【注】隹(唯)  (德)  (附)民,隹(唯)宜(羲)可  (張)
 :「附」字異體,臣附之附的專字。
 :同「張」「《廣雅·释詁》:「張,大也。」《尚書·康誥》:「張皇六师。」;《左傅·桓公六年》:「我張吾三軍。」;《荀子·王霸》:「不務張其羲。」
【注】其永俘(寶)用亡(無)彊(疆)。
俘:讀為「寶」或「保」。《左傅。莊公六年》經文「齊人來歸衞俘。」,「俘」字《公羊傅》、《榖梁傅》俱作「寶」。
 
 
 
 
 
【해석】
唯十四年,中山王  命相邦賈,擇燕吉金,鑄為彝壺,節於禋齊。可法可尚常,以饗上帝,以祀先王。穆穆濟濟,嚴敬不敢怠荒,因載所美,昭則皇功,詆燕之訛,以儆嗣王。
 
14년, 중산왕 착은 상방 賈(司馬賙)에게 명을 내려 연나라의 최상급의 금을 구해서 청동예기 中山王方壺를 주조하게 하고 천제(天祭)를 지내게 한다. 이 기물을 법으로 삼고 그 의미를 늘 간직하여 상제에게 향식의 제를 올리고 선조에게 제사를 지내도록 한다. 거룩하고 거룩하도다! 매우 공경스러워 감히 황망되게 하지 못할지니 아름다운 바를 담아내고 왕의 공을 밝히며 燕의 과오를 꾸짖는 것 경계로 삼아 앞으로 왕의 뒤를 잘 이어가야한다.
 
唯朕皇祖文武桓祖成考,寔有純德遺訓,以施及子孫,用唯朕所放。慈孝寬惠,舉賢使能。天不斁其有願,使得賢士良佐賈,以輔相厥身。余知其忠信也,而專任之邦。是以遊夕飲食,靡有遽惕。
 
짐은 선왕이신 文公 武公 桓公과 할아버지 成王을 생각해볼진대 참으로 다들 순려한 덕과 유구히 남겨진 가르침이 있었다. 이 가르침을 자손들에게 미쳐 시행하게 하였다. 이제는 내가 이를 풀어놓는 바이다. 자애 효성 관용 은혜로운 성현을 등용할 줄 아는 이를 천거하라. 하늘 또한 그 바램을 싫어하지 않을지니 司馬賙를 도울만한 성현을 구해서 나라의 안위를 잘 지킬 수 있게 하라. 짐이 그 忠과 信을 알고 변함없이 나라를 믿고 맡길 수 있다면 봄가을로 연중 두 차례 巡行할 때 갑자기 두려워지게 되는 것이 적어질 지어다.
 
 
【의의】
   명문을 통해 전국시대 중말기 중국 북방지역의 역사에 대해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중산국은 전국시대부터는 정식 국명으로 ‘中山’을 사용했다. 기원전 314년에는 중산국이 齊와 손잡고 燕을 정벌한다. 500리와 성 10곳을 획득했다. 기원전 307년에 조나라 무령왕 ‘胡服騎射’ 발언, 즉 기마전술 채택함을 엿볼 수 있다. 기원전 296년 조나라의 침략을 받고 멸망했다. 중산국의 왕 은 기원전 344년에 태어나 기원전 327년에 중산국 제5대 국왕이 되었다. 재임기간은 기원전 327년부터 기원전 313년까지 14년간이었다. 은 武功이 뛰어났으며 국가를 부강하게 하려 노력했으므로 군주가 될 만했다. 그는 燕과 趙를 공격하는 등 전례 없는 강한 국력을 발휘하여 중산국을 잠시나마 강국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하지만 은 생전에 자신의 왕릉을 세우는데 많은 자금을 투자하고 유희를 즐기길 좋아하는 등 생활이 비교적 사치스러웠다. 그는 36세라는 젊은 나이에 서거했다.
청동기명문의 장식서체의 변천을 파악할 수 있다. 중산명문의 아래로 시원스럽게 쭉 내려뻗은 세로획이 특색이 있다. 가로획이 만나지 않는 모습도 자주 등장한다. 中山王鼎에서는 ‘之’ 자가 많이 보이는데 바로 이 ‘之’ 자가 세로획수필들이 가로획과 만나지 않는 자형의 전형적인 예이다. 이렇게 획끼리 만나지 않게 되자 세로획 수필의 뾰족함을 들어내게 되었다. 이런 부분들이 모여 북쪽지역 전국시대 문자의 특징인 剛峭한 미감이 돋보이게 된다. 그래서 험준하고 웅장하며 힘이 넘치는 강인한 느낌을 준다. 아울러 남방명문처럼 꼬불꼬불하게 굴리는 맛이 아니라 쭉쭉 뻗치는 필세가 독특하다. 이러한 필치와 획 자체의 힘 있는 모습이 결합되어 더없이 강한 힘의 미감을 주고 있다. 획 속에서는 새겨지는 방식으로 인해 마찰감이 느껴져 더욱 그 힘을 돋보이게 하고 있다. 중산국명문은 균형을 잘 맞추고 있다. 지나치게 화려하지도 그렇다고 엄정하기만 하지도 않다. 마찰감에서는 속도의 빠름과 느림의 조화, 리듬감에서는 한 획 속에서의 지나치게 굵거나 가늘지 않은 제안의 원리를 잘 지키고 있다. 이런 명문의 특성은 중원문화를 받아들이면서 자신의 독특한 문화도 잘 지켜온 중산인들의 조화로운 삶과 문화에서 우러져 나온 것으로 보여진다.
중산삼기 명문을 통해 명문이 발굴되기 이전 문헌상 전해지지 않던 중산국의 사회적 기능과 풍속, 역사와 문화 등의 역사적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중산국 명문은 전국시대 중말기에 드물게 보여지는 장편의 명문이었으므로 이 명문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한 학자들이 많았다. 李学勤 张政烺 商承祚 黄盛璋 于豪亮 등의 학자들이 다각도로 고석을 했고 다채로운 역사가 밝혀졌다.
전국시대 청동기명문의 심미연구의 큰 중심축을 제공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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关于相室考证,参照于豪亮:《古玺考释》,载《于豪亮学术文存》82-87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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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学勤、李零:《平山三器与中山国史的若干问题》,载《考古学报》,1979年第二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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参照商承祚:《中山王 鼎、壶铭文刍义》,载《古文字研究》,1982年第七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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林宏明:《战国中山国文字研究》,博士学位论文,台湾古籍出版社,2003年,第240-241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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黄盛璋:《中山国铭刻在古文字、语言上若干研究》,载《古文字研究》第七辑,中华书局,1982年。
参照徐海斌、陈爱和:《中山王方壶铭文“愿从士大夫”的释读及相关问题》,载《井冈山学院学报》,2009年第九期。
于豪亮:《中山三器铭文考释》,载《考古学报》,1979年第二期。
段连勤:《北狄族与中山国》,广西师范大学出版社,2007年3月,第162页。
 
 
平山落实保护规划建设中山国考古遗址公园
2014-03-18
一开春,平山县中山国遗址管理所所长黄军虎就马不停蹄地为恒公墓、王厝墓的修复工程忙碌着。“我们今年要启动的修复工程,主要是给这俩墓建立保护性的围 栏,并对残损缺失的封土进行必要的覆土整形加固,对陪葬坑进行回填……”在中山古城王厝墓旁,黄所长给我们细致地介绍着,“目前,保护修复工程进入招标阶 段,我们正在通过河北省第一批文物保护工程招标代理机构通过招标择优有实力的文物保护机构按照国家文物局批复《保护方案》进行施工保护。”据悉,这次修复 是中山国遗址公园建设的重要一环。
战国中山国有着无可比拟的历史地位,独特的文化艺术特色,但由于历史等种种原因,与其文化、旅游发展的规模远不匹配,与邯郸赵王城、张家口元中都等一些大 遗址已经形成大规模文化产业的相比,中山国的文化产业只能算刚刚起步。而当前平山县域经济正处于转型升级的关键时期,也面临大气污染防治的严峻形势,平山 作为工业大县,在危机中寻找出路,在抓紧推进工业转型升级的同时,做大做强文化、旅游业成为平山县绿色崛起的又一新的增长极。“眼下,中山国的保护性开发 在此转型升级之际迎来了难得的机遇,县里也紧紧抓住了这次机遇,乘势而上,掀开了中山国保护性开发的新篇章,2012年4月《中山古城遗址保护规划》获国 家文物局批复同意、2013年5月22日并经省政府批准公布。同年10月,县里完成了中山古城国家考古遗址公园立项汇报。”说到这里黄所长难掩心中的激 动,“咱终于盼来了中山国系统开发的时候。”
去年以来,中山国保护性开发的工程已经紧锣密鼓的实施起来,耗资100多万元对中山国王陵文物陈列馆进行了重新布展和环境整改、中山国王陵文物安全技术防 范系统建成使用……“我们先后在王厝墓、恒公墓、哀后墓等几个重点墓地安装了地波威震动报警探测系统,在整个中山国景区全程安装了监控系统。”工作人员赵 彦龙介绍,“哪怕你用铁锹铲一脚,我们也能检测到,景区有一丝风吹草动我们都知道的一清二楚,有效防止了盗墓和一些人为破坏行为。我们还完成了中山古城遗 址张家庙区域1:200地形图,1:1000地形图,为今年文物调查、勘探发掘打下了良好的基础。”
该县还适时叫响“古都中山国 圣地西柏坡”的口号,将“中山国”推到一个新的高度,同时在召开项目推介会、招商引资会时,也打出了这张文化招牌。为推进遗址公园建设,还准备谋划成立由 政府牵头、相关部门参加的“平山县中山古城遗址保护领导小组”,和直属于县政府领导的中山古城遗址保护与发展委员会,全面负责境内的中山国古城遗址的管理 和保护工作。
按照《中山古城遗址保护规划》,届时中山古城国家考古遗址公园将成为一座集文物考古、科研、科普、观光旅游于一体的考古遗址公园,2000多年的千乘之国的文明将再“复兴”,必将为建设生态、文明、富裕、和谐的中等城市增添浓墨重彩的一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