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戰國時代 中山國 靑銅器 銘文의 崇高美 考察
관리자 | 조회 353
戰國時代 中山國 靑銅器 銘文의 崇高美 考察
 
 
閔 勝 俊
 
< 抄錄 >
 
본 논문은 ‘战国鲜虞陵墓’로 불리는 중국 河北省 平山의 中山国王墓에서 출토된 中山國 靑銅器 銘文의 書體美를 심미적으로 고찰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한다. 1977년에 출토된 河北省 平山县 中山王陵 청동기들은 그 제작기법이 아주 탁월하였다. 이 중산국 청동기들을 통해 청동기시대에서 철기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였던 战国时代 말기의 중국 북방지역 청동기 예술이 최고의 경지에 올라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에 필자는 그런 우수한 청동기를 제작한 이들에 의해 제작된 长篇의 銘文은 어떠했을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본 논문의 연구대상은 中国 战国时代 中山國 靑銅器 銘文이다. 평산현 중산왕릉에서 출토된 많은 청동기 가운데 길이가 긴 장편의 청동기 명문이 있는 기물은 4개가 대표적이다. 中山王 鼎,中山王 方壶,中山王 圆壶 마지막으로 왕릉의 무덤설계도인 铜板兆域圖가 그것이다. 中山王 鼎에는 469자, 中山王 方壶에는 450자, 中山王 圆壶에는 204자, 兆域圖에는 418자의 銘文이 발견되었다. 이들 명문들은 이전에 볼 수 없었던 큰 규모였기 때문에 엄청난 주목을 끌게 되었다.
이러한 큰 관심으로 인해 중산국 청동기는 많은 학자들에 의해 연구되어졌다. 중국학자들은 錯金, 錯銀된 镶嵌이라는 제작기법과 그 기법으로 제작된 청동기 기물과 문양에 대해서 제일 큰 관심을 가졌다. 중산국 청동기 명문에 대해서는 문자학적인 관점으로 연구되어졌으며 그 문자학적 해석을 통해 역사학, 고대민속학으로 고찰한 자료들을 찾아 볼 수 있었다. 아쉽게도 중산국 청동기 명문의 書體美에 대해선 연구되어진 자료가 드물었다. 대부분의 중국학자들은 전국시대 중산국 청동기 명문을 전국시대 三晋의 서체와 비슷하다고 과소평가하고 특별히 연구하지 않았다. 이에 서체미와 관련한 연구업적을 쉽사리 찾을 수 없었다.
한국에서 중산국 청동기를 연구한 대표적 학자로는 이형구와 강윤옥이 있다. 이형구는 한국고대사에 파헤치려는 시각으로 중산국의 다양한 청동기 유물들을 통해 중산국 문화전반을 연구했고, 강윤옥은 주로 중산국 청동기 명문만을 연구대상으로 삼았다. 중산국 청동기 명문의 異體字를 고찰했으며, 또한 이들 명문에서 나타난 通假现象을 위주로 音韵系统에 대해 연구했다. 중국과 한국에서 이루어진 중산국 청동기 명문을 대상으로 한 연구는 대체로 文字와 音韵이 주를 이루었다. 전국시대 장편의 중산국 청동기 명문의 서체미를 审美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아직 연구되어지지 않은 부분이라 새로운 연구가치가 있다고 판단된다.
   한편 兆域圖 418자는 연구대상에서 제외시켰다. 祭禮용 기물이 아니라는 점과 崇高美에 초점을 두고 审美的으로 서체미를 바라보려고 하는 이유 때문이다. 필자의 이런 시각이 공통적으로 작용했는지, 많은 중국학자들도 兆域圖의 명문은 연구대상으로 삼지 않고 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대표적인 중산국 청동기 명문으로 中山王三器를 명시하고 이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中山国三器는 中山王 鼎, 中山王  方壶, 中山王 圆壶를 줄여 표현한 용어이다. 中山王三器 銘文을 연구대상으로 하여 중산국 청동기 명문의 서체적 특색과 심미를 고찰해 보고자 한다.
 
 
주제어 : 战国时代, 中山国, 青铜器, 铭文, 崇高美, 摩擦
 
 
 
  
 
Ⅰ. 緖言
Ⅱ. 本論
1. 中山國의 靑銅器 文化
2. 中山國三器 銘文의 多質性
3. 中山國 靑銅器 銘文의 分析
Ⅲ. 結語
※ 參考文獻
 
 
 
 
 
Ⅰ. 緖言
 
    본 논문의 연구대상은 中国 战国时期 中山國 靑銅器 銘文이다. 중산국 청동기 명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中山王三器 銘文’이다. 바로 中国 河北省 平山县 中山王陵에서 출토된 청동기 유물 가운데 가장 많은 문자가 새겨져 있는 기물들이다. ‘中山王三器’는 ‘中山王 鼎’, ‘中山王 方壶’, ‘中山王 圆壶’ 이렇게 세 기물이다. 중산국의 제5대 왕 ‘ ’의 이름을 근거로 지어진 명칭이다. 이 기물들은 기물모양과 특징에 따른 이름도 있다. 즉 철로 제작된 발이 붙어 있는 거대한 정이어서 ‘鐵足大鼎’, 기룡무늬가 있는 네모난 호여서 ‘夔龍纹方壺’, 둥근 형태를 가진 호여서 ‘铜圓壺’라고도 불리어진다. 중국학계에선 이들 기물을 줄여서 ‘中山王三器’라 부르고 있다. 필자도 본 논문에서 이에 준해서 부르고자 한다. 바로 이 중산왕삼기에 새겨져 있는 문자를 통하여 중산국 청동기 명문의 서체의 특색과 심미를 고찰하고자 한다.
審美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崇高美에 대해 다루고자 한다. 숭고미를 거론하게 된 것은 河北省 平山县 中山王陵에서 출토된 靑銅器가 전국시대 말기 청동기 예술의 높은 성취를 반영하고 있는데 그 이유가 있다. 또한 ‘中山王三器 銘文’이 전국시대 청동기 명문 文字美化의 裝飾書體로 대미를 장식하는 시기적 의미, 长篇의 문자가 있는 銘文이라는 특수성, 명문의 서체미에서 볼 수 있는 고고함 등의 개성이 있어 다른 명문과는 다른 비범함을 주는데 더 큰 이유가 있다. 하지만 중산국 청동기 명문만의 崇高美를 논한다는 것은 커다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이 당시 대부분의 청동기가 祭禮를 목적으로 한 기물이었고, 왕의 神聖化를 표현하기 위해 饕餮문양 등으로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으므로 그 기물에 주조되거나 새겨진 대부분의 청동기 명문에서는 보편적으로 숭고미가 존재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중산국 청동기 명문만의 崇高美가 무엇인지 말로 표현하기 힘들지만 가만히보고 있으면 다른 명문에서와는 뭔가 특별한 숭고함이 느껴진다. 명문의 미감을 파악하는 데 있어 중요한 것은 중산국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그들의 삶의 흔적을 살펴보는 것이다. 지리적인 여건으로 중원의 영향을 받았으나 그들만의 전통을 잘 살려 내려온 북방소수민족의 문화적 특색, 남방과는 다른 거친 자연환경조건, 강대국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 있었다. 그런 그들의 몸짓과 삶의 흔적들이 인간의 감정을 잘 살릴 수 있는 새김이라는 기법과 어우러지자 중산국 청동기 명문만의 독특한 숭고함이 나올 수 있게 된 것이다.
    ‘中山國 靑銅器’의 화려한 제작기법인 错金, 错银된 镶嵌기법과 ‘中山王三器 銘文’에 보이는 마찰감이 돋보이는 새김 기술에 중점을 두었다. 이런 기법들이 새로운 숭고미를 낳았다고 추정하고 심미적 안목으로 중산국 청동기 명문만의 숭고미를 고찰해 보려한다. 1977년 河北省 平山县 中山国王陵에서 대량의 중산국문물이 발굴되었다. 이 고고학적 사건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中山国 王의 세 기물의 명문을 분석한 张守中의 통계에 의하면 출토된 器物은 모두 118점으로 靑銅器 90점, 玉器 26점, 木器 2점이며, 그 중 청동기에 가장 많은 명문이 수록되어 있다고 한다. 中山王 鼎 469자, 中山王 方壶 450자, 中山王 圆壶 204자의 명문이 있다. 兆域圖에도 418자의 청동기 명문이 있다. 이는 청동기 명문으로 흔치 않았던 굉장히 많은 수량의 명문이었다. 게다가 그 당시에는 드물었던 새김의 방식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러한 대규모 长篇 청동기 명문의 발견은 학계에 큰 의미를 던져주고 있다. ‘中山王三器 銘文’은 중산국에 관한 문헌이 미비했던 학계에 역사적 사료를 확실하게 제시해 주고 있어서 전국시대 언어와 문자를 연구함에 큰 의의를 지니는 것이라고 언어학자 강윤옥이 밝혔다. 중산국 청동기 명문은 전국시대 청동기 가운데 숭고함을 지닌 장편의 명문으로 그 연구가치가 높다. 또한 남방의 조충서와는 다른 미감을 풍기는 북방지역의 대표적인 장식체명문으로 대표된다. 게다가 북방소수민족과 중원의 華夏민족의 문화가 융합된 새로운 미감이 銘文에 반영되었다. 전국시대 중기 이후 청동기 기물 외벽에 摩擦을 일으켜 镌刻하는 방식으로 제작된 것도 시선을 사로잡는다. 새김의 떨림, 마찰이 될 때의 열기, 자극을 받아 터지는 느낌들이 정교하게 드러나 기존의 주물로 제작된 명문들과는 다른, 색다른 숭고미를 만들어 내고 있다.

Ⅱ. 本論
 
1. 中山國의 靑銅器 文化
 
郭沫若(1892~1978)은 <서주, 동주시대 금문의 고찰과 해석> 중에 ‘杕氏壺’를 거론했는데, 이 청동기 기물의 명문이 바로 명확하게 이야기 할 수 있는 중산국의 제일 초기 청동기이다. 이 후에도 춘추시대부터 전국시대 전기에 이르기는 기원전 6세기에서 기원전 5세기까지 墓葬 가운데, 많은 청동기가 출토되었다. 대표적인 묘장으로는 河北省 行唐縣의 李家莊, 廟上村의 黃龍崗, 北城子, 釣魚台 및 滿城縣의 采石廠, 平山縣의 訪家莊, 新樂縣의 中同村 등이 있다. 중산국 경내의 주요한 청동기물로는 鼎 · 甗 · 豆 · 壺 · 盤 · 鑿 등이고, 어떤 묘에는 '豆'형식의 釜 · 瓿 · 簋 · 敦 등도 있다.
戰國時期 中山國 青銅器는 河北省 平山縣 三汲에 위치한 中山王墓에서 출토된 유물이 대표적이다. 출토되어진 청동기로는 鼎 · 鬲 · 簋 · 盒 · 豆 · 壺 · 盉 · 盤 · 神獸 · 編鍾 · 屏座 · 帳構 · 兵器 · 車馬器 · 山字形器 · 兆域圖版 등이 있다. 그 중 많은 청동기상에 새겨지거나 주조된 명문이 있었다. 이들 중 장편 청동기 명문이 있는 것으로는 鼎, 壺, 兆域圖版이 있다. 그중 새겨진 명문은 鐵足大鼎, 夔龍飾方壺, 銅圓壺가 가장 돋보인다. 모두 1099자로 중산국 역사의 공백을 메워주고 있으며, 아울러 제작시기가 기원전 321년부터 기원전 314년이었음도 명확히 알려주고 있어 역사사료 증명에 가치가 있다.
 중산국 청동기는 대표적 특색인 금, 은으로 상감된 기법과 아울러 독특한 청동기 제작기법을 보이고 있다. 바로 두 종류의 다른 금속으로 복합 주조한 기법이다. 中山王三器중의 하나인 ‘中山王 鼎’을 보면 청동으로 된 몸통과 철로 된 발이 복합적으로 사용된 것을 알 수 있다. 그 기법상 특징으로 ‘鐵足大鼎’이라고도 불리는 것이다.
중산국은 춘추전국시대 太行山 남쪽에 자리한 작은 나라이다. 燕나라와 赵나라 사이에 끼여 있는 중산국은 중국 북방 소수민족 白狄족의 한 갈래인 鲜虞人이 세운 국가이다. 지금의 河北省의 경계 내에 있으며 正定县을 중심으로 한다. 중산국은 기원전 6세기쯤 陝西省 북쪽지역에 거주하던 白狄들에 의해 세워졌다. 燕,赵,齐 같은 강대국 사이에 끼여 있는 지리적인 위치로 인해 비록 긴 세월동안 강대국의 침략을 받으며 중원문화의 영향아래 놓여 있었다. 하지만 춘추전국시대에 이르기까지 북방유목민족의 문화적 특색을 잃지 않고 매우 잘 보존해 내려왔다. 강대국사이에서 자신의 문화를 지키며 끈질기게 살아남은 저력은 우리나라와 비슷하다. 이형구는 중산국이 한반도와 큰 관계가 있다고 믿고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그는 중국학자들이 밝히기를 꺼려하는 鲜于璜碑 비문 좌측하단의 箕子에 대한 기록을 제시하였고, 중산국의 대표적 문물인 ‘山’자형 청동기 휘장과 신라금관의 근접성, 중산왕릉과 동이족의 전형적인 묘지형태인 享堂의 유사성을 비교하며 우리나라와의 밀접한 관계를 연구하고 있다.
 중산국의 왕 은 기원전 344년에 태어나 기원전 327년에 중산국 제5대 국왕이 되었다. 재임기간은 기원전 327년부터 기원전 313년까지 14년간이었다. 은 武功이 뛰어났었으며 국가를 부강하게 하려 노력했으므로 군주가 될 만했다고  전해진다. 는 燕과 赵를 공격하는 등 전례 없는 강한 국력을 발휘하여 중산국을  잠시나마 강국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하지만 은 생전에 자신의 왕릉을 세우는데 많은 자금을 투자하고 유희를 즐기길 좋아하는 등 생활이 비교적 사치스러웠다고 전해진다. 그는 36세라는 젊은 나이에 서거했다.
중산국은 전국시대부터는 정식 국명으로 ‘中山’을 사용하게 되었다. 중산국은 위나라와 3년간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위나라의 식민지가 되었다. 이를 역사에서는 중산국의 1차 멸망이라고 부른다. 중산국은 20년 만에 나라가 회복된다. 복국이후 70년에서 80년 사이 중산국은 최전성기를 맞이한다. 기원전 369에서 기원전  314년 사이의 기록은 흥미롭다. ‘ ’왕의 집권기로 중산국이 가장 번영했던 시기이다. 기원전 332년 무렵에는 중산이 제와 연합하여 조나라를 정벌했다고 추정된다. 기원전 323년에는 중산국은 齊, 魏, 趙, 燕과 함께 왕 칭호를 얻게 된다. 기원전 314년에는 중산국이 齊나라와 손잡고 연나라를 정벌한다. 500리와 성 10곳을 획득했다. 기원전 307년에 조나라 무령왕 ‘胡服骑射’ 발언, 즉 기마전술 채택함을 엿볼 수 있다. 기원전 296년 조나라의 침략을 받고 멸망했다.
중산국은 독창적인 예술성을 이룩하였다. 그 독특한 문물들을 살펴보자. 이전에 보여지지 않던 독특한 조형인 청동으로 만들어진 ‘山’자 모양의 기물은 바로 중산국의 휘장이다. 전국시대의 청동기 주조공예기술은 전 시대 보다 크게 성장했음을 볼 수 있다. 중산국 사람들은 각종 선진적인 청동기공예 제작기술을 잘 갖추어 자신들의 문화도 한층 더 발전시켰다. 이로서 독특한 특색과 정교한 아름다움을 갖춘 중산국만의 아름다운 청동기를 창조한 것이다.
   전국시대 중기에 이르러 청동기에 명문을 새겼다. 하북 평산의 중산왕릉에서 발견된 대형 禮器석 점이 발견되었다. 이것이 바로 中山王 鼎,中山王 方壶,中山王 圆壶으로 모두 기물의 표면에 칼로 새긴 것이다. 그 기술이 특히 뛰어나 아주 높은 예술적 가치를 지닌다. 또한 중산왕릉에서 출토된 문물가운데 玉器는 1000여 개 이상인데, 그것들은 단단하고 윤택하면 색이 온화하다. 숭고함과 보배로움의 상징이다. 대부분 추상적인 동물 형태가 새겨져 있다.
중산국의 청동기 기술자들은 기물형태의 우아미를 매우 강조했다고 전해진다. 그들은 인물과 동물형상의 각종자태와 생동감 넘치는 모습뿐만 아니라, 교묘하게 인물, 동물과 상응하는 꽃무늬 및 각종기물의 장식도 담아내어 그것들이 서로 渾然一體하여 정말 살아있는 느낌을 준다. 이러한 것은 금, 은으로 상감된 기법으로 청동에 제작된 ‘双翼神兽’ 신화 속 날개달린 신비한 짐승과 ‘象嵌虎筮鹿屛風揷座’ 사슴을 잡아먹는 맹렬한 호랑이 형상의 가리개 받침대가 대표적이다. 쌍익신수는 ‘有翼神獸’로도 불리며 그 높이는 40.5㎝이다. ‘象嵌虎筮鹿屛風揷座’의 높이는 51㎝로 중산국 청동기는 기물 표면에 금속을 상감하여 풍부하고 다채로운 모습을 표현했다. 금을 박은 명문과 상감 기술이 유행하여 기물의 겉모양이 더욱 수려한 모습을 띨 수 있었다. 또 하나 빠트릴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树形连盏’이다. 이 수형연잔은 ‘十五連盞銅燈’ 라고도 불리는 나무 형태의 등잔이다. 15개의 이어진 등잔 위에 8마리 귀여운 원숭이들이 기어오르며 노는 광경에 조형이 생동감 넘칠 뿐 아니라 빛나고 곱고 아리따운 도안이 어울려 있다. 북방 유목민족의 기동성 있고 민첩하고 기민함이 뿜어 나오고 있다.
한편 중산국 사람들은 술을 잘 빚었다고 전해진다. 지금까지 이어 내려오는 술과 관계된 많은 신기한 이야기들이 있다. 고분에서 출토된 술은 이미 매장된 지 2300년이 넘었다. 그런데 여전히 그윽한 향내가 품어져 나오는 듯하다. 이는 최근 세계에서 제일 처음 발견된 가장 오래된 실물의 술이다.
이러한 풍부한 문화유산은 中山国 사람들이 총명하고 지혜로웠다는 사실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그들은 북방의 우수한 문화를 계승한 동시에 또 선진 중원문화를 흡수하여 전 세계인을 놀라게 할 만한 찬란한 문화를 창조해냈다.
 
2. 中山王三器 銘文의 多質性
 
가. 중산왕삼기 명문의 俗體
 
  중산국 삼기명문에는 일반적인 중산왕삼기의 서체미와는 사뭇 다른 隸变의 흔적이 보이는 명문이 있다. 바로 中山王 圆壶 銘文이다. 중산국 삼기명문 중 명문수가 적은 편인 中山王 圆壶의 배 부분에는 3줄 59행으로 177자의 명문에 새겨져 있다. 이 기물의 복부 이외에 圈足에서도 한 줄의 형식으로 새겨진 문자가 발견되었다. 바로 이 명문이 아주 매력적이고 독특하다. 어리숙하고 뭉뚱하고 납작한 자형이면서 여전히 전서의 운필모습을 느낄 수 있다. 아래로 힘차게 뻗은 중산왕삼기 명문의 전형적인 자형과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 자형이 많이 간략해지고 예서로 변해지는 隸變의 느낌을 보여주는 것이다. 전국시대 秦의 영토인 사천성에서 출토된 靑川木牘과도 그 모습이 유사하다.
中山王三器 銘文이 발굴된 河北省과 靑川木牘이 발굴된 四川省은 지리적으로 거리가 꽤 멀어 서로 연관성이 있었다고 보기 어려울 것 같다. 하지만 그 시대적 흐름이 유사하며 중원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중산국 문화로 볼 때 그 가능성을 열어두고 싶다. 청천목독은 전국시대 말기 秦나라 武王 2년인 기원전 30년에  쓰여 진 것으로 추정된다. ‘中山王 圆壶 圈足 铭文’은 청천목독과 동시대인 전국시대 말기, 세로로 긴 자형이 지배적이던 기존의 흐름을 깨고 가로로 납작한 자형의 모습을 취한 점과 행과 간격에 구속됨 없이 참치하고 자유로운 흐름이 너무나 닮아있다. ‘중산왕착원호 권족 명문’은 청동기 명문으로서는 흔치않게 글자를 빨리 새겨 표현하게 되면서 예서로 향하게 되는 과도기 성향을 보인다고 볼 수 있다. 청동기명문에서 예변을 느낄 수 있어 흥미를 준다. 중산왕착원호 권족 명문은 새기는 위치의 불편성 때문인지 아니면 개인적 감정이나 심미관을 담은 것인지 분명치 않지만 계산되지 않은 속체의 천진하고 자연스런 맛이 돋보인다.
이 명문을 俗體의 범주에 넣는다면 다른 중산왕 명문은 雅體로 삼을 수 있다. 남방의 금으로 상감된 명문으로 대표되는 曾侯乙墓에서 출토된 청동기 명문도 俗體, 雅體, 正體로 구분되고 있어, 이 두 명문으로 북방과 남방의 명문의 특성을 비교분석해 보는 것도 의의가 있겠으나 지면의 한계 상 도판으로 제시하고 다음을 기약한다.
 
나. 상감기법 명문과 새겨진 명문
 
 错金, 错银된 镶嵌기법이 탁월한 중산국 이었지만, 청동기 명문에는 이 기법을 적용시키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국력을 강화시켜 중산국의 위상을 높였던 중산국 제5대 왕 은 그의 업적을 견고한 청동기에 남겨 영구히 보존하고자 했을 것이다. 많은 문자를 금으로 상감한다는 것도 문제가 되었을 것이다. 상감기법으로 만들어진 명문들을 보면 그 의문이 풀린다. 상감기법은 장식성이 뛰어나고 고귀해 보이는 장점이 있지만 청동기에 새기는 것보다 오래 보존되지 못한다. 이로 인해 제왕의 업적을 기록해 후대에 길이 전하기 위한 목적인 제례기물보다는 악기인 钟, 编钟 등의 악기나 剑같은 병기, 혹은 장식기물인 尊에 제작된 것이 많았다. 대표적으로 曾侯乙鐘이 있다.
청동기 표면에 금, 은로 가늘고 섬세하게 상감되어져 고귀한 맛이 나는 것을 错金, 错银이라 한다. 이러한 금, 은으로 상감된 기법은 춘추전국시기에 출현한 것이다. 错金과 错银은 본래 装饰工艺기술이었다. 장식미를 추구하기 위해 명문도 이 기술로 인해 다양한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명문의 위치가 기물내부에서 기물 표면으로 옮겨져 더욱 공을 들이게 되는데 이 또한 착금, 착은 기술의 발달을 가져온 원인이다. 최근까지 우리가 볼 수 있는 제일 오래된 错金청동기는 바로 착금 명문이 있는 欒書缶이다. 춘추 중기의 것으로 5행의 40자의 긴 명문이 착금법으로 되어 있다.
错金된 명문은 일반적으로 각종의 미술적 문자가 사용되어지는데 그중 가장 많이 사용되는 것이 吴나라 越나라의 ‘鸟虫书’이다. 조충서는 虫书 ․鸟篆 ․鸟籀으로 불리어지는데 즉 전서 중에서 장식성이 뛰어난 서체이다. 착금된 조충서 명문은 춘추시대부터 전국 초기까지는 ‘越王州勾剑’와 ‘越王勾践剑’처럼 주로 병기상에 사용되었고 진나라 한나라에 이르러서는 壶등의 용기상에도 보여진다. 상해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金错鸟篆纹铜壶’와 河北省 滿城 西漢墓에서 출토된 ‘金银错鸟篆纹铜壶’가 그 예가 된다.
금으로 상감된 명문으로 남방에 鸟虫书가 있다면 북방의 晋나라에는 ‘子之弄鸟尊 銘文’이 있다. 획의 중간이 두텁고 기필과 수필이 뾰족하여 올챙이 모양과 흡사하다. 후대의 蝌蚪文과 비슷한 모습을 보이며 이러한 자체적 특징은 侯马와 温县에서 발굴된 옥에 붓으로 쓴 ‘盟书’와 유사하다.
중산국은 우수한 상감기법이 있었지만 ‘中山王三器 銘文’에선 그 기술이 발휘되지 않았다. 하지만 동일한 시기 상감기법으로 제작된 명문들과 서체상 비슷한 점이 많이 보인다. 中山王三器 명문의 획은 지역적으로 가까웠던 북방의 晋나라의 필획의 형태와 닮아 있다. 과두문의 특색인 획의 중간이 두텁고 양 끝이 뾰족한 것으로 ‘子之弄鸟尊’ 만큼 두드러지게 강조되진 않지만 그 모습이 은근히 보이고 있다. 中山王三器 명문은 남방의 착금 명문인 조충서의 장식적 느낌도 비슷한 면을 찾아볼 수 있다.
 
다. 摩擦로 바라보는 숭고미
숭고는 인간의 자아초월과정이라고 한다. 관계를 새로 맺어야 공감을 얻을 수 있다.
 
1. 대상
인간 스스로 왜소함을 느끼게 하는 것: 초월하도록 압력을 가하는 것
자극을 받는다 성장의 동기 부여
서양- 극복해야할 대상 적대자로 취급 - 적대자
동양- 위대한 숭배의 대상 극복하려 해선 안된다 - 격려자
发平静, 止乎礼仪
 
자연은 숭고하다 - 자연을 바라보는 시각
 
2. 방향
서양-상대방과 본래의 자신을 싸워 이기는 것이 목적
다양성 비규정적 승리의 다양한 가능성이 표현된다
 
동양 - 격려자에게 귀의하는 것 방향은 규정적이며 본보기가 있다
 
3. 과정
서양- 격렬한 부정의 부정의 과정
동양- 긍정적 유쾌한 상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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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학 고대 -화해, 비극
근대- 숭고
현대- 부조리, 자유를 추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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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고
 
刘鹗 《老残游记》
모든 문화에는 화해와 비극성이 존재한다.
화해는 문화적으로 가장 이상적인 극치이고, 비극은 현실적으로 가장 이성적인 극치이다.
 
화해-꿈과 희망
비극-보고싶지 않은 일 보여준다 냉혹한 사실, 절망적 고통만 존재
 
성숙한 문화만이 비극의식을 가질 수 있다.
성숙하다는 의미는 갖은 고생을 다 겪어 닳고 닳아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이 강해진 것을 말한다.
인간은 도전에 맞서 싸워왔다. 도전을 기회로 삼아 전진하여 왔다.
비극적 숭고의식, 자신을 지키고 침략에 저항하려는 비장함 - 숭고
보존과 파멸 곤경을 폭로하면서도 곤경을 보완한다
진리 추구의 비극 - 오이디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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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는 인류의 초월성 심리적 태도로서 숭고는 인간이 초월 심리로 해석- 니체
두려움, 적대적 존재, 공포의 대상 어둡고 모호한 것- 버크
칸트
브래들리 - 사람의 초월은 일종의 자아를 포기해 버리는 것 과 숭고한 대상에 대해 숭배하는 것
캐리트 우월적 경외 경탄의 대상
롱기누스 미칠듯한 희열
 
브래들리는 이렇게 숭고를 정의한다. 숭고는 범상치 않은 체적과 힘은 우리의 주의를 끈다. 우선은 숭고에 대해 좌절 혹은 거부의 소극적 상태를 띤다. 뒤이어 자아의 확장 혹은 향상되어짐을 거쳐 최후의 감정은 객체와 합일되는 적극적인 감정이다. 러시아 미학가 체르니세프스키는 미는 생활이다. 삶은 비극이다. 비극속에서 극복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숭고하다. 라고 했다. 이렇게 보면 비극속에서 고통을 극복하면서 살아온 중산국 사람들에게는 숭고미가 바탕에 깔려 있는 것이리라 여겨진다.
 
중국 청동기의 명문은 대부분 주조되어진 것이다. 이렇게 주조되어지다가 전국시대 중기에 이르자 새로운 변화가 도래했다. 새기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서주시대 후기부터 새겨서 표현하고 있었다. 서주시대 후기 새긴 문자가 나타나기 시작하여 춘추시대에는 그 수가 조금씩 늘어났다. 서주시대 후기 ‘晋侯苏编钟 銘文’ 355자는 예리한 도구로 새긴 좋은 예이다. 모두 16점으로 한 세트를 이루는 이 鐘은 각 종의 크기가 일정하지 않다. 따라서 이들이 원래 짝을 이루는 한 세트로 주조된 것이 아니라 각각의 음계에 따라 입수할 수 있는 것들을 모아서 구성했을 가능성이 크다. 마찬가지로 명문 역시 처음부터 계획하여 주조한 것이 아니고 편종으로 조합한 뒤에 새겼을 것으로 추정된다. 전국시대 중기 새겨진 문자는 이와는 조금 다르다. 기물의 외벽에 아주 긴 장편의 명문을 새긴 것이다.
새긴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해 보자. 마찰이다. “마찰은 상호의존이다.” 둘이 만나 서로 의존하여 작용을 하며 떨림을 만들고 열을 발생시킨다. 이렇게 나온 떨림과 열은 집중을 할 수 있게 도와준다. 그 집중이 새김의 숭고미를 낳는다. 필자는 마찰에 관심이 있다. 이분법으로 바라보는 사고를 버려야 한다. 醜가 있기에 美가 있는 것이다. 만물은 상호의존하고 있다. 자립과 의존, 외향과 내성 이런 개념은 이분법적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심리학적 의미에서의 그림자란 바로 나의 어두운 면, 즉 무의식적인 측면에 있는 나 의 분신이다. 자아의식이 강하게 조명되면 될수록 그림자의 어둠은 짙어지기 마련이 다. 선한 나를 주장하면 할수록 악한 것이 그 뒤에서 짙게 도사리게 되며 선한 의지를 뚫고 나올 때 나는 느닷없이 악한 충동의 제물이 됨으로써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게 된다.”
 
외국어는 내성적이면 잘 배울 수 없고 외향적이어야 빨리 습득할 수 있다고 한다. 이것도 사실은 이분법적으로만 보고 있는 것이다. 사실 한 사람이 어떤 상황에 놓이느냐가 그 사람을 달라지게 만든다. 자신이 흥미를 가지게 되는 일을 하는 순간 사람들은 누구나 외향적이고 활발해진다. 어떻게 하면 동기유발을 하고 집중하여 열을 내게 할 수 있을까? 상호의존이고 마찰이다. 어떻게 하면 잘 비벼지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자극을 주고 동기유발을 시킬 것인가 심리작용을 잘 이해해야한다.
청동기 예술에서 숭고미는 빈번히 饕餮같은 거부할 수 없는 위압감, 나와 다른 대단한 무엇이란 외형적 모습에 치우쳤다. 필자는 전국시대 다양한 장식성을 가진 문자미화 현상들이 출현한 것은 바로 개인을 각성하는 심미관의 출현이라고 본다. 청동기 기물과 새긴 기술자의 손이 직접적으로 상호의존하고 마찰하면 열을 낸다는 것은 바로 체험이다. 그 체험 속에서 만들어지는 자신만의 개성이 진정한 의미의 숭고한 아름다움이 아니겠는가.
 
3. 中山國 靑銅器銘文의 分析

  ‘中山王 鼎’은 높이가 51.5㎝이고 鼎의 덮개에 있는 세 개의 뉴와 세 발 사이에 77행 467자의 명문이 镌刻되어 있다. ‘中山王 方壶’는 높이가 63㎝이다. 네 면에 전부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각 면은 10행으로 이루어져 있고 매 행마다  일반적으로 12자씩 포치되어 있다. 전체 명문 수는 450자이다. ‘中山王 圆壶’는 명문 수가 셋 중에서 제일 적다. 높이는 44.5㎝이고 복부에는 3줄 59행으로  177자의 명문에 새겨져 있다. 또한 中山王 圆壶 圈足에서 한 줄로 된 명문이 발견되는데 그 수는 명확하지 않다.
        이 중산왕삼기 명문을 서로 비교해 보면 명확하게 들어나진 않지만, ‘中山王 鼎’이 다른 것들 보다 좀 더 거친 숨이 느껴지는 마찰감이 엿보인다. 인생의 굴곡이 담긴 듯 조금 꺼끌꺼끌함이 있는, 생활 속의 숭고미가 쌓인 것 같은 ‘中山王 鼎’의 명문이 매력적이다. 왜 이런 차이가 나는지 고민해 보았고, 두 가지를 제시해 본다. ‘中山王 鼎’은 발이 철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아 전체가 청동으로만 만들어진 ‘中山王 方壺’와 ‘中山王 圓壺’에 새기는 것에 비해 마찰감이 더 발생했을 것이다. 두 종류의 다른 금속으로 복합 주조되어 기물 면이 더 단단할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새길 때 사용했던 도구의 차이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새긴다는 의미로는 镌과 刻이 있다. 하지만 이 둘은 사용하는 재료나 사용기법에 따라 차이가 있다. 镌은 끌 같은 공구로 찍어 파면서 새기는 것이고 刻은 칼로 밀거나 당기거나 찍어나가면서 새기는 방법이다. 우연인지 모르지만 중국의 많은 중산국 연구논문에서 中山王 鼎 명문을 설명할 때는 镌으로, 中山王 方壺와 中山王 圓壺에서는 刻으로 새긴다는 의미를 표현하고 있었다. 이는 우연의 일치로 보인다. 하지만 문자를 통해 어떤 공구를 사용하여 새겼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면 의구심을 해결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中山王三器 铭文이 기물에 새겨진 전체 章法을 보자. 얼마나 잘 구성되어 있는지 감탄이 절로 나온다. 이는 중산국 삼기명문들을 기물위에 포치한 것이 전체적으로 얼마나 치밀하고 정교한 계산과 디자인을 거쳐 이루어진 것인지를 절로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글자와 글자 사이 행과 행 사이의 공간도 매우 엄정하게 지키고 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것은 雅體적 특성이 강한 中山国 青铜器 铭文이다.
서체미에 대해 분석해 보자. 중산왕삼기의 명문은 자형이 길고 늘씬하며 장식성을 갖추고 있다. 이런 모습은 그 당시 아름답게 꾸며진 명문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특색이다. 그렇다면 中山王三器 명문만의 서체의 특색은 무엇일까? 그 특색을 찾기 위해선 中山王三器 명문은 새겨진 것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새겨졌기 때문에 기존의 주조된 명문들에서 흔히 보이던 덩어리감은 찾아볼 수가 없다. 이런 덩어리감으로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주물로 만들어진 명문에서 흔히 보이게 되는 획이 굵어지는 변화, 획과 획이 만났을 때 그 부분이 부풀어 오른 느낌의 熔铸感이다. 다른 하나는 좀 더 과장된 면적인 표현이다. 그 예로 춘추시대 중, 말기 楚의 王子午鼎 명문의 ‘福’자를 들 수 있다. 결구 및 포치상의 장식에 속하기도 하고, 순수하게 文字美化의 필요로 인해 첨가되기도 한 전국시대 齐의 陈纯釜 铭文의 ‘둥근 점’을 들 수 있다. 王子午鼎 명문 가운데 ‘福’자는 이 두 가지 덩어리감을 다 갖추고 있다. ‘示’에서는 획의 굵기의 변화와 획이 만나는 부분의 변화를 볼 수 있고, ‘田’은 과장된 면적인 표현을 하고 있다. 이에 비해 中山王三器 명문에선 이런 덩어리감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로 인해 전국시대 북방지역의 특징인 웅장하며 힘이 넘치는 剛峭한 느낌이 더 부각되어진다. 같은 시기 다른 명문에 비해 과장된 표현이 드물고 산뜻하고 선명한 기운이 느껴진다.
쭉쭉 뻗어 강건하고 힘 있는 직선이 특징인 中山国三器 명문도 곡선과 조화되는 부분들이 있다. 직선과 호선이 완벽하게 융합되어 있는 특징이 있는 것이다. 이 모습을 보고 있으면 중산국의 문화가 떠오른다. 华夏문화와 白狄문화가 잘 어우러진 모습이 상상되는 것이다. 이런 직선과 호선의 자연스런 융합은 문자결체를 고도의 아름다운 경지로 이끌고 있다. 한편 ‘氏’, ‘夜’, ‘明’ 등의 글자에서 보이는 점과 획의 끝을 돌돌 말아 표현하는 장식성은 자칫 지나치게 엄숙할 수 있는 정적인 분위기를 화기발랄하게 동적으로 이끌고 있다. 이러한 표현은 주로 점과 획이 끝나는 수필부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전국시대 다양한 文字美化의 서막을 열었다고 평가되는 남방 楚나라의 대표적 장식체인 王子午鼎 铭文과 대조해 보면 그 특징이 확연히 들어난다. 하나는 남쪽에서 다른 하나는 북쪽에서 각각 서로 호응되고 대비되면서 춘추전국시대 조충서 명문 중에서 쌍벽으로 불려진다. 왕자오정 명문은 조충서 발전의 서곡을 연주해주고 중산왕 3기의 명문은 조충서의 종결의 막을 알리고 있다. 물론 王子午鼎은 춘추시대 중, 말기이고 中山王三器 铭文은 전국시대 중, 말기이여서 시기적으로 조금 차이는 있다. 하지만 장편의 장식체 명문이라는 공통점과 전국시대 청동기 명문 장식미의 시작과 끝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 남과 북을 대표할 만한 장식체 명문이므로 두 명문은 서로 비교 분석할 만한 가치가 있다. 남방지역 춘추시대 명문인 王子午鼎 铭文에서는 鑄造되어진 영향으로 서주시대 청동기 명문에서 보였던 획과 획이 만난 부분에서 塊面이 남아있다. 이런 부분이 진귀하고 우아한 아름다움을 부각시켜 주고 있다. 이런 덩어리감이 비록 서주시대에 비해 많이 약화되었지만 제작된 기법의 동일화로 그런 모습이 여전히 남아 있는데 반해 中山王三器 명문에는 线적인 느낌이 더 강하며 심지어 획과 획을  떨어뜨려 표현하고 있기 까지 하다. 아래로 시원스럽게 쭉 내려뻗은 세로획에 가로획이 만나지 않는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中山王 鼎에서는 ‘之’ 자가 많이 보이는데 바로 이 ‘之’ 자가 세로획에 가로획이 만나지 않는 자형의 전형적인 예이다. 이렇게 획끼리 만나지 않게 되자 세로획 수필의 뾰족함을 들어내게 되었다. 이른 부분들이 모여 북쪽지역 전국시대 문자의 특징인 剛峭한 미감이 돋보이게 된다. 그래서 험준하고 웅장하며 힘이 넘치는 강인한 느낌을 준다. 아울러 남방명문처럼 꼬불꼬불한 굴리는 맛이 아니라 쭉쭉 뻗치는 필세가 독특하다. 이러한 필치와 획 자체의 힘 있는 모습이 결합되어 더없이 강한 힘의 숭고함을 주고 있다. 획에서는 새겨지는 방식으로 인해 마찰감이 느껴져 더욱 그 힘을 돋보이게 하고 있다.
 
Ⅲ. 結語
중산왕삼기 명문은 새겨지는 마찰감과 조화로운 리듬감으로 중산국만의 숭고미를 잘 드러내고 있다. 중산왕삼기 명문을 살펴보면서 중산국만의 숭고미를 풀어볼 수 있는 요소들을 발견해냈다. 그것은 바로 속체와 예변, 상감과 새김, 마찰과 관계이다.
춘추시대 말기에서 전국시대 전기는 굉장한 변화가 일어난 시기였다. 그 변화 중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문자에 대한 가치관의 변화이다. 수많은 전쟁이 있었으며 그 속에서 보수적인 귀족들이 몰락하게 된다. 그들의 몰락은 ‘士’라는 독립적인 새로운 계층을 출현시켰다. 그들은 각 국을 돌면서 자신의 정치적 주장과 학술사상을 유세하고 선전했다. 각 국들도 그들의 사상을 받아들여 자신들만이 신성하며 정통을 이은 정당한 국가임을 밝히고자 했다. 이들의 사상들이 각 제후국들에게 받아들여지게 되고 사용되어진 언어는 곧 문자화 되었다. 받아들여진 사상들은 문서화 작업이 이루어졌다. 즉 문자가 대중성을 갖게 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하여 은상 및 서주시기의 官府에서만 사용할 수 있었던 신성함의 상징으로서의 문자가 민간으로 조금씩 퍼져나가 보편적으로 사용되어질 계기를 만들게 된다. 각 제후국들이 자신만의 특별한 개성을 드러내기 시작하여 개인적 심미적 시각이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중산왕 삼기 명문이 이를 잘 대변해 주며 명문 가운데 속체가 있어 예변을 증명해 주기도 한다. 심미는 근대적 자아이 각성과 맥이 통한다. 이런 흐름이 있었기에 중산국의 강초한 맛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또한 새김을 통한 마찰과 관계도 중산국만의 숭고미를 낳았다. 우리는 관계속에서 살아간다. 최근 우리 사회의 화두는 소통이다. 문화예술계에서도 소통을 주제로 한 작품활동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이런 작품들을 보면서 관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 보게 된다.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을 바로 아는 것이다. 인도의 수련가 요기들은 순간순간이 깨어 있음을 통해 거친 파동의 움직임을 정묘한 파동의 움직임으로 이끌어 내는 마음작용의 원리를 수련의 체험을 통해 알아가고 있다.
 
21세기 양자 물리학은 '나비효과'등의 이론을 통해 '초기 조건의 민간성'을 이야기 한다 "나비의 작은 날개 짓이 태평양의 태풍을 일으킨다." 움직임과 호흡의 전환의 순간에 깨어 있음으로써 조절, 방향의 전환이 가능하다 거칠게 움직이려는 파동의 진폭을 정묘하게 만들어 균형에 도달하게 하는 것은 깨어 있는 정신 지혜 바로 빛이다.
 
먼 과거의 일을 확인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먼 미래에 대한 예측이 종종 틀리듯이 먼 과거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사실과 다른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역사란 승리자들의 일기이기 때문이리라. 살아남은 자들이 남긴 그들의 업적을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미술사학적 체험과 미학적 감성을 가지고 체득한 상태에서 문자예술을 바라보아야 한다. 직접적으로 접해보아야 진정함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맹목적인 받아들였던 도서관의 자료를 넘어서서, 체험을 통한 경험과 어려운 용어로 가득 찬 책에서 탈피한 주관적 감성으로서 느끼는 감정을 중심으로 파악하려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비단 中山國 靑銅器 銘文만 아닌 많은 靑銅器 銘文들은 역사적 자료의 보고로, 그 가운데 상당수가 아직 역사적 비밀을 드러내지 않은 채 연구자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中山国 銘文 아닌 여러 금문들이 연구와 발전이 이루어져 중국 고대사의 면모가 더욱 명확히 밝혀지리라 믿는다. 아울러 현대인들이 잃어버리고 있는 감수성을 오래된 진수들을 통해 회복시킬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관계
인문학은 관계의 성찰이다. 때문에 나는 관계학이라 부른다. 인문에서 문[文]은 서로가 어울려[义] 이루는[ㅗ] 무엇이다.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고(나와 나), 이웃과의 관계를 생각하며(나와 너), 그로써 나와 세계의 바람직한 관계(나와 우리)를 찾는 거다. '나-너-우리'라 할 수 있다. 바람직한 것을 이루려 하지만, 그게 바람직할 지 어떨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끊임없이 돌아보고 문제를 찾아 해결책을 내놓지만, 그게 맞는다는 보장은 없다. 역설적으로, 이게 인문학의 매력이다. 불가능한 것을 찾아 멈춤 없이 나아가는 거다. 그러는 동안 인간과 인간, 인간과 세계의 관계가 넓고 깊어진다. 서로 열어 나누는 풍성한 삶이다.
고로, 인문학은 고유의 틀 속에 가둘 수 없다. 가둘 수 없는 걸 가두어버리니까, 위기에 빠진 거다. 또한 인문학의 위기는 인문학만의 위기가 아니다. 학문, 나아가 문명 전반의 위기다. 어느 무엇도 '나-너-우리'라는 관계성과 떨어질 수 없다. 이 바탕을 무시한 채 쌓아올린 학문과 문명은 모래 위에 쌓은 성과 같다. 첨단 과학을 자랑하는 시대에, 생태계 파괴니 인간 소외니 하는 불길한 말들이 떠도는 건 왜일까? 얻을 것만 챙기느라 관계가 끊기는 걸 돌아보지 못한 때문이다. 첨단의 시대에 돈 안 되는 인문학이 꼭 필요한 이유다.
 
3
이 책에서 나는 한번쯤 생각했어야 할 관계를 꺼내 들었다. 나를 들여다보고, 내가 맺는 관계들을 살피고, 뉘우칠 건 뉘우치고, 찾아야 할 걸 찾고자 했다. 무엇보다 알려져서 익숙한 것을 비트는 데 집중하였다. 나는 어떤 경우에도 정답만큼은 피해야 한다고 본다. 젊은이라면, 정답을 비틀고 물구나무 세우는 짓을 감행해야 한다. '젊은이'란, 나이가 젊다는 뜻만은 아니다. 나답게 살아보려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젊은이다. 그래서 부탁하건데, 읽는 분이 나이를 먹었더라도, 젊게 읽으시길 바란다. 설익은 것을 스스로 익히고, 비튼 걸 다시 비틀고, 뒤집어 놓은 걸 다시 한 번 뒤집어 주시길...... 마지막에는 '자기 생각'만 남았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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