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이역의 시인 박해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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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수: 16    업데이트: 15-01-03 16:18

보도자료

시간ㄷ 쉬고.... 일상도 쉬고... 느릿 느릿 찾아간 추억 정거장
박해수 | 조회 1,117

시간도 쉬고… 일상도 쉬고…
느릿느릿 찾아간 추억 정거장

(위)‘신성한(神) 숲(林)’이라는 뜻의 강원도 원주 신림역. 역 주위에 심어놓은 나무들이 크게 자라 도로에서는 잘 보이지 않지만, 하루 8번 이곳에 무궁화호 열차가 정차할 때마다 이 오래된 간이역은 마법처럼 제모습을 드러낸다. (아래)1980년대를 연상시키는 부산 기장군 좌천역.

모든 게 빠르다. 고속열차가 시속 300㎞를 넘나들고 그 멀다는 미국도 비행기로 11시간 안팎이면 갈 수 있다. 텔레비전에선 "빠름, 빠름, 빠름"을 외치며 통신망을 선전하고, 직장에서는 "시간 내에 일을 마무리 지으라"고 재촉한다.

이러한 시대에 무궁화호 열차 여행은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는 일. 하지만 모두가 '빠름'을 이야기할 때 '느림'을 찾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휴가일 터. 휴가라는 게 일상에서 벗어나 숨돌리는 것임을 생각하면 말이다. '느림'을 찾고 싶은 당신에게 무궁화호와 간이역에서 즐기는 '느린 휴가'를 소개한다.

오전 8시 30분 부전행 4량짜리 동해남부선 무궁화호 열차가 출발했다. 열차는 창밖 나무가 어떤 모양새를 했는지, 철길 옆 도로 표지판엔 뭐라고 쓰였는지를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느리게 달렸다. "터덕터덕" 하는 소리에 맞춰 사람들이 고개를 까딱까딱 흔들었다. 마치 자동차 앞자리에 붙여놓은 인형처럼.

창밖에선 마을의 낡은 풍경이 영화처럼 흘러갔다. 장맛비에 말갛게 씻긴 하얀 비닐하우스, 군데군데 담벼락이 무너진 슬레이트 지붕집, 고철더미를 산처럼 쌓아올린 고물상이 열차 뒤로 달음질쳤다. 수북하게 가지를 뻗은 수풀은 터널을 지날 때마다 삐죽삐죽 벼가 자란 논으로 바뀌었다.

차장은 열차가 역에 닿을 때가 되면 콧소리를 냈다.

"우리 열차 잠시 후면 ○○역에 도착합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영천역 같은 제법 큰 역에 닿자 열차 안이 북적거리기 시작했다. 우산을 지팡이 삼아 걷는 할아버지, 군복에 빳빳하게 각을 잡은 이등병, 통통한 가방을 옆에 놓고 고개로 방아를 찧으며 조는 청년, 보자기에 싼 물건을 정성스럽게 품에 안은 아주머니가 기차를 타고 다시 내렸다.

①1915년 완공된 고딕 양식의 원주 용소막 성당. ②부산 기장 좌천역을 통과하는 새마을호와 정차하고 있는 무궁화호가 플랫폼을 사이에 두고 엇갈리고 있다. ③부산 기장 장안사로 올라가는 길에 맑고 시원한 계곡이 흐른다. / 이경민 영상미디어 기자 kmin@chosun.com
시간도 멈춰서는 좌천역

무궁화호는 예정보다 7분 늦은 오전 11시 17분에 좌천역(左川驛·부산광역시 기장군)에 도착했다. 중간중간 역에서 맞은편 열차를 먼저 보내느라 시간이 지체됐다.

좌천역은 1934년에 지어진 역이다. 화장실 등 내부는 손을 봤지만, 외관은 처음 지어질 때 그대로다. 단정한 초록색 기와에서 발처럼 내리뻗은 빗물받이가 정갈했다. "좌천역에서 내일로 티켓(만 25세 이하 승객이 7일간 새마을호와 무궁화호를 무제한 이용할 수 있는 표)을 사면 (과거 직원들이 썼던 숙직실에서) 무료 숙박제공"이라고 쓴 안내판에서는 넉넉한 인심이 묻어났다. 철길에서 역사로 이어지는 길에는 커다란 향나무가 도열해 있었다. 역이 만들어질 때 심은 나무라고 했다. 세월과 함께 풍성해진 가지 밑에 서면 비가 와도 몸이 젖지 않았다.

1970~80년대만 해도 이곳은 울산과 해운대를 잇는 구간에서 가장 큰 역이었다. 부산에서 경주로 가던 열차가 이 역에서 물을 보충할 때는 주민 수십명이 플랫폼으로 들어가 김밥과 음료수를 팔았다고 한다. 하지만 1978년 고리원자력발전소가 인근에 문을 열면서 이곳은 그린벨트로 묶였다. 집을 새로 짓는 것은 물론 보수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그 사이 하루 2000여명이 찾던 이 역은 하루 160~170명이 찾는 작은 역이 됐다. 2015년 부전~태화강 단선구간이 복선으로 되면 이 역은 헐리고 광장이 들어설 계획이다.

역전은 '장안탕'이라는 목욕탕 굴뚝이 마을을 내려다보는 작은 읍내였다. 낡은 회색 기와집 한 채에 교복사, 의상실, 양복점, 컴퓨터 세탁이 낡은 회색 기와집 한 채에 사이좋게 모여있었고, 쌀을 쪄낸 연기가 폴폴 나고 고소한 녹두 송편을 파는 방앗간이 있었다. 대를 이어 50년도 넘게 한자리에서 만두를 팔았다는 '제일분식'에는 그 흔한 전화번호 하나 보이지 않았다.

길에서 만난 주민들은 장안사와 임랑해수욕장이 볼거리라고 했다. 역전 삼거리에서 30분쯤 기다려 9번 버스를 탔다. 아주머니 승객이 탈 때마다 운전기사가 "아지매, 비도 오는데 뭐할라꼬 자꾸 타는겨"라며 정겹게 '핀잔'을 주는 걸 들으며 도착한 장안사에선 빛바랜 단청을 인 대웅전이 객을 맞이했다. 문무왕 13년(673년) 원효대사가 '쌍계사'로 창건했다는 이 절은 임진왜란 때 소실됐다가 17세기 중반 중건됐다고 한다. 조용한 경내를 돌아 사문(寺門)을 나서니 풀벌레 소리, 새소리, 바람소리가 가득했다.

임랑해수욕장도 9번이나 3번 시내버스를 타면 5분 안에 갈 수 있었다. 아기자기한 벽화를 그려넣은 민박집들이 귀엽다 했는데, 모래사장에선 파도가 맹렬하게 몰려오다 하얗게 명을 다하고 있었다. 고(故) 박태준 전 국무총리의 생가로도 유명한 곳이다.

전원 속에 자리를 잡은 신림역

백련초·쑥·고구마 등으로 색을 낸 원주 황둔찐빵마을의 오색 찐빵.
이튿날 오전 8시 50분 서울 청량리역에서 출발하는 중앙선에 몸을 실었다. 중앙선은 서울에서 출발해 경기도와 강원도뿐 아니라 충청북도(제천)까지 꿰어 달리는 꽤 부지런한 열차다. 나들이하기 좋은 토요일 오전이라 그런지 나이가 지긋한 노신사에서부터 아기를 데려온 부부, 한쪽씩 이어폰을 나눠 낀 젊은 연인까지 열차는 다양한 사람들로 북적였다.

청량리에서 출발한 중앙선은 서울 경기 구간이 복선으로 되어 있어 초반부터 속도를 냈다. "타닥타닥" 대신 "다다다다" 하는 소리가 났다.

중앙선이 통과하는 구간에는 산이 많다. 산들은 풍성하게 나뭇잎을 부풀려 7월의 햇살을 피하고 있었다. 산 사이 평지에는 삐뚤 빼뚤 제멋대로 생긴 논들이 경쾌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저 집 닭백숙이 끝내주게 맛있어"라는 뒷자리 승객의 말을 듣다 잠이 든 것 같은데 눈을 떠보니 열차는 치악산 산허리의 가파른 구간을 지나 신림역(神林驛·강원 원주시 신림면)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신림역은 1956년에 만들어졌다. 원래는 1941년 처음 문을 열었지만 6·25전쟁 때 소실됐다. 지금의 신림역은 연한 베이지색 벽에 붉은 기와를 얹은 작은 간이역이다. 등산객 2명 등 기차에서 내린 7명은 흐트러짐 없이 정돈된 대합실을 재빨리 빠져나갔다. 역무원은 "신림역에는 하루 평균 상하행 각 4대의 기차가 서고 하루 이용객은 20명 정도"라고 했다.

신림역을 나와 논두렁 길을 따라갔다. 걸음마다 수풀에서 뛰어나온 어린 메뚜기들이 우렁이가 깔린 논으로 뛰어들었다. 신림역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용소막 성당이 있다. 1915년 완성된 고딕양식 성당인데, 강원도에선 풍수원 성당, 원주성당에 이어 세 번째로 오래된 성당이라고 했다. 성당은 회색 벽돌로 보를 세우고 붉은 벽돌로 벽을 채웠다. 주춧돌은 화강암이었다. 일본강점기에는 성당의 종이 공출되고 6·25전쟁 때는 북한군 창고로 사용됐다는 곳이다. 어른 3명이 팔을 이어도 에워싸기 어려울 만큼 밑동이 굵은 느티나무와 벽을 수북하게 덮은 이끼가 세월을 말해줬다. 성당 옆 마당에서 수녀는 장미 가지를 잘라 땅바닥에 꺾꽂이하고 있었다.

신림역은 치악산 국립공원에 인접해 있다. 역 앞에서 21번 버스를 타면 가리파 계곡, 치악산 휴양림, 금대계곡을 이용할 수 있다. 주민에게 색다른 곳을 물으니 25번 시내버스를 타라고 했다. 찐빵집 9개가 다닥다닥 붙어있는 '황둔찐빵마을'을 갈 수 있는 방법이라고 했다. 이전엔 주인들이 빵을 팔아 땅을 사고 건물을 샀을 정도로 붐볐던 곳이지만 인근에 새 도로가 생긴 뒤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줄어들어 조금씩 잊혀가고 있는 곳이다. 그래도 찹쌀, 단호박, 백련초, 흑미, 쑥, 고구마 등을 넣어 색을 낸 찐빵의 차진 맛은 여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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