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이역의 시인 박해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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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수: 13    업데이트: 14-03-19 14:56

저서

맨발로 하늘까지
아트코리아 | 조회 1,197

박해수 시인의 열다섯 번째 시집 《맨발로 하늘까지》. 시인은 불꽃같은 창작 열정과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은 시심으로 삶의 旅情과 삶의 본질을 절절하게 노래하고 있다.

 

《자서(自序)》

1962년 〈학원〉지 “가을 낮” 시 입상,
1964년 대륜고등 재학 중 시집 『꽃의 언어』 발간,
중앙초등에서 동시 “바위”를 소년기에 시작하여 여태껏 시를 안고 오며 칠순이 눈 앞에 섰다.
1974년 제1회 한국문학 신인상 “바다에 누워”로 문단에 나온 후 시를 붙들며 현재 살고 있다.

이승의 삶이 보이고 죽음도 보인다.
대구에 살면서 시의 그늘 속에 꼭 꼭 숨어서 “맨발로 하늘까지” 가보고 싶었다.

외로울 때, 슬플 때 혈연의 죽음에서 시는 무엇일까?
목련꽃 순결, 목련꽃 블라우스를 시의 퇴비에 얹어 놓았다.
쓰고 또 써도 항상 부끄러움이 묻어나는 걸 숨길 수 없다.

순결한 마음으로 기도하며 사는 게 시보다 훨씬 낫다는 걸 생각했으나 잘못 든 버릇이 또 부질없는 한 권의 시집을 묶는다.
오래전부터 묵혀둔 시들을 끄집어 내어 먼지를 턴다.
묵언 정진하는 시의 마음,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맨발로 시의 길을 가고 싶다.
맨발로 하늘까지 가보고 싶다.

시집을 엮어 주신 온북스 편집부와 축하의 글을 써 주신 국제문예 발행인 배용파 님께 두 손 모아 고마운 마음을 올린다.
이 시집은 이승을 떠나 계신 아버지, 어머니, 형 박해종, 아우 박해욱(요셉)과 곁에서 고생한 김 글라라에게 바친다.

《해설》

삶의 旅情과 詩人의 노래
- 박해수 시인의 삶과 詩 世界

배용파(시인, 국제문예 발행인)

박해수 시인은 시와 함께 살고 시와 함께 죽을, 숙명적으로 시인으로 태어난 ‘참 시인’의 전형으로 나에게는 깊게 각인되어 있다. 文學, 그리고 시 창작은 그에게는 삶 그 자체라고 해도 전혀 이상하거나 어색하지가 않다. 그만큼 그의 삶의 旅情은, 그리고 삶 그 자체도 시창작과 문학활동을 떼놓고는 생각할 수가 없다. 무엇보다도,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드물었던 1960년대의 고등학교 재학 중 발간한 시집 《꽃의 언어》에서 보듯 그는 어린 시절부터 시와 함께 살아온 ‘참 시인’이라고 하겠다.
어느덧 반세기, 50년의 詩作活動을 넘어선 박해수 시인의 열다섯 번째 시집 《맨발로 하늘까지》에서 시인은 불꽃같은 창작 열정과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은 시심으로 삶의 旅情과 삶의 본질을 절절하게 노래하고 있다.

새벽 5시 30분 수성 못 맨발로 걸으며
울음나무 곁으로 간다.
툭, 툭 얼룩지는 삶의 그늘이 발톱긴풀로
그늘진 물그림자를
꽁꽁 묶고 있다. 북새통 반세기, 시를 껴안고 울었으나
울음나무가 되지 못했다. 종(鐘)을 치고 싶었다.
젖어서 마음 젖은 맨발로 하늘까지 가면 된다.
- “맨발로 하늘까지” 中

위의 시에서 보듯이 시 창작을 향한 시인의 뜨거운 창작투혼과 문학에 대한 끝없는 그리움을 엿볼 수 있다. 문학이야말로 자신의 삶 그 자체이듯이 한없이 문학 속으로 빠져들고 있는 것이다.
1960년대, 대구시 중구 달성동에는 대구의 대표적인 공원이었던 달성공원이 있었는데 이곳에 이상화 시인의 시비가 있었다. 바로 이곳이 전국의 문예콩쿨 입상자들을 비롯한 ‘학원문학상’ 출신들, ‘한국학생시우회’ 출신들 등 문학을 사랑하는 젊은 청춘의 문학마당이었으며 박해수 시인도 거의 매일을 이곳 이상화 시비 곁에서 문학과 함께 하며 보냈다.
특히 그가 다녔던 대륜고등학교는 이상화, 이육사 등 한국의 시 문학사를 빛낸 시인들이 나온 곳이어서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겨울 응혈,
흰눈이,
영천 만불사, 납골당에 내렸다
버릴 것 다 버려 두고
빈 것으로 다가왔던가
마흔 아홉, 다 넘기지 못하고
빈 들판, 거뭇, 거뭇
생채기 하 많던 삶이었기에
지상의 것들,
겨울 응혈로 흥건하니
순간 겨울 동백꽃이 붉게 폈다
겨울 동백꽃 같은 등불이 그리워,
응혈로 된 흰눈이 내린다.
- “아버지” 전문

어머니 무덤에 눈 뜬 먼 별들을
더 높은 곳에 뜬 별들을
슬픔의 양지녘 산길을 돌아서 갔네
별들, 더 멀리 북극 남극보다
더 먼 먼, 길, 먼 별들을 가리키며
먼 별들 속에서 푸른 귀 바닷물소리
생살 푸른 몸짓으로 푸른 어머니 별

열아홉, 철로에 선 부평의 몸을
별지고 곧장 이승을 내려오는
행가래 치는 이승의 물이랑
물 먹은 별들이 팍팍한 가슴을 치고 있다.
- “먼 별들속으로” 中

일본의 경도상업전문을 나오고 점잖으시기만 했던 시인의 부친과 대구의 명문 신명여고보를 졸업하고 팔남매(당시로서는 흔한 경우였음)를 훌륭하게 키우신 어머니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과 사모의 정을 시인의 특유의 필치로 서술하고 있어 읽는 이들의 마음을 적시고 있다. 특히 젊은 나이에 타계하신 아버지에 대한 안타까움과 애석한 심정은 상금도 시인의 마음 한구석에서 자리하고 있는 듯하다.
사실 박해수 시인과 필자는 감수성이 예민했던 사춘기의 십대 시절을 한 동네에서 보냈기 때문에 비교적 서로의 집안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아침마다 지금은 고인이 된 박 시인의 형과 함께 등교하려고 박 시인의 집을 방문하여 앞마당에서 놀고, 기다리고 하던 때가 참으로 그리운 시절이었다. 한창 예민하고 호기심이 많았던 십대 시절, 비교적 깨끗하고 고급스런 대구의 삼덕동에서 우리들은 끝없이 푸른 꿈을 키워가느라고 젊음을 불태우기에 여념이 없었다.

잔을 들고 삶의 잔을 들고
삶을 위하여 울지 마라.
네 가슴의 심장보다 더 붉은
삶을 위하여 삶의 꽃 잔에
붉은 진홍빛 이탈리아 와인
수성못 벨기에 시인
베르나르 랑베르시, 동화사
칠월의 폭우 석가탑
석굴암에 우는 석가새는
왜관 베네딕도 수도원 뽈리 신부
가슴에 와 박혀 떠나지 못하네
삶을 위하여, 시를 위하여
네 기도는 이 한밤 여름밤
폭우 속에서 우네, 해인사
- “레치암, 레치암” 中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기도 한 박해수 시인은 삶을 위한 기도보다도 시를 위한 기도에 더 자신의 몸을 던질 정도로 레치암을 부른다. 더 나아가 시인의 고향 대구와 근교의 동화사를 방문한 프랑스의 대표적 시인인 베르나르 랑베르시와 왜관 베네딕도 수도원의 뽈리 신부까지도 시를 위하여 부를 정도로 온 몸을 던지고 있음을 본다.
박 시인의 대표적인 시 “바다에 누워”는 1974년 제1회 한국문학 신인상으로 당선되었을 때 붉은 200자 원고지 넉 장에 담아 쓴 시로 당시 김동리 선생이 발행인이었던 「한국문학」지에 발표되었으며 편집장이었던 소설가 이문구 선생과 김춘수 시인의 전화 등으로 당시의 한국문단에서 크게 주목을 받았다.
당시의 대구는 교육과 문화의 도시로서 미술과 음악, 시와 소설, 그리고 막걸리와 사과가 풍요로운 낭만이 넘치는 고장이었다. 기라성 같은 문필인, 화가, 음악가들이 뽐내는 문화예술의 중심지로서 김동리, 박목월, 현제명, 박태준, 이흥렬 등과 청라언덕, 약전골목, 동성로, 향촌동 그리고 수성못과 달성공원 등은 박해수 시인이 영남지역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우뚝 설 수 있게 하는 충분한 자양분과 토대를 제공하여 왔다고 볼 수 있겠다.

산의 아랫도리가 젖어 있었다.
내설악(內雪嶽)에서
잠시 쉬어가는
자궁나무를 보았다.
출렁거리는 것은 바다가 아니라
서해와 동해가 아니라
산의 아랫도리가 젖어 있었다
내설악(內雪嶽)
잠시 쉬어가는
자궁나무를 보았다
출렁거리는 것은 바다가 아니라
서해(西海)와 동해(東海)가 아니라
마음이었다, 마음은 작약꽃
내설악(內雪嶽) 내스락, 내스락,
내스락, 내스락, 가랑잎 지고
- “내설악(內雪嶽)” 中

이 시에서 시인이 인용하고 있는 내설악, 자궁나무, 바다에서 볼 수 있듯이 시인은 메타포 기법을 원용하여 세속적인 현실을 넘어서지 못한다면 결국은 삶의 본질은 그 본래의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는 것을 부드러우면서도 날카롭게 지적한다.

누구보다도 고향을 사랑하고 아끼는 영남지방을 대표하는 향토시인이면서도 나아가서는 조국의 산하를 온 몸으로 껴안으려는 듯 빼어난 서정성으로 간이역 시 세계를 구축하여 온 박해수 시인!
반세기를 넘어선 창작을 향한 불꽃 투혼과 그가 걸어온 고독한 여정(旅程), 온 몸으로 시의 삶을 살아온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서정주의 시인이자 ‘참 시인’의 전형(典型)인 박해수 시인에게서 우리는 시인이 쌓아온 시 세계의 속살에 어느 정도는 다가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
긴 세월 시인이 구축하여 온 방대한 시의 세계와 역사관에 대하여는 다시 논급할 기회가 있으리라 믿고,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 번 시집 출간을 축하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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