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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회 개인전

遊於藝의 경지에서 선보이는 한글서예의 조형미학 - 정 태 수 (한국서예사연구소장
아트코리아 | 조회 1,377


遊於藝의 경지에서 선보이는 한글서예의 조형미학

-백천 류지혁 선생의 작품세계-
정 태 수 (한국서예사연구소장

 

"외상 술값이야 늘 가는 곳마다 깔려 있지만[酒債尋常行處有] / 인생 칠십은 예로부터 드물도다[人生七十古來稀]"이 시는 중국 당나라 두보(杜甫)의 곡강시(曲江詩)에 나오는 구절이다. 사람들은 이로부터 나이 칠십을 고희(古稀)라 부르게 되었다. 옛날에는 그만큼 이 나이를 넘어서는 사람이 드물었다는 의미이다. 또한 공자는 나이 칠십이 되면 하고 싶은 대로 하여도 법도를 어기지 않는다[從心所慾不踰矩]고 말하였다. 즉 무엇이든 마음대로 행동해도 크게 상식에 어긋나지 않을 정도로 충분한 식견과 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로 보면 될 듯하다. 그러나 의술의 발달과 생활여건이 좋아진 현대에 이르러 나이 칠십은 숫자에 불과한 편이다. 특히 서예가에게 있어 이 나이는 한창 본인의 작품세계를 다듬을 때이다. 당나라 구양순이 76세에 대표작인 <구성궁예천명>을 썼고, 추사 선생도 70이 넘은 나이에 역작을 남기지 않았던가.


한글서예의 거장인 백천(栢川) 류지혁(柳志奕) 선생(이하 선생으로 호칭)이 이제 고희를 맞아 대규모 작품전을 펼친다. 성장기에 붓과 먹을 가까이 할 수 있는 여건이 되어 학창시절부터 서예를 좋아했었고, 중년기에 접어들면서 하던 사업을 접고 오로지 서예가의 길에 모든 것을 걸고 매진해 왔다. 현재 선생은 한글서예가로 국내외에 필명이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작품세계를 향해 용맹정진하고 있다. 우리는 이번 전시에서 그 일단을 엿보게 되었다. 작가로서 그는 어떻게 살아왔고, 어떤 세계를 향해 나아가고 있을까.


이 글에서는 선생이 휘호해 온 예술의 길을 따라가면서 가학으로 시작한 입문기, 화촌 선생을 만나 기본을 다진 학서기, 대구예술대학교 서예과에 입학해 서예를 전공한 변화기, 2000년 대 이후 독자적인 조형 시각을 보여주는 개화기로 나누어 선생의 작품세계를 살펴보고, 이번 작품전에 출품된 작품양식을 일별해 보려고 한다. 이를 통해 앞으로 나아갈 방향도 어렴풋이 조망할 수 있을 것이다.

 

1. 家學으로 시작한 서예


지금부터 70년 전, 광복이 되던 1945년에 선생은 경남 밀양시 무안면 운정에서 유덕수 어르신과 도성효 여사 사이의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예닐곱 살이 되면서 집에서 아버님이 직접 만들어준 구궁지에 천자문을 쓰면서 서예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다 집안의 35세 연상인 종질 고당(顧堂) 류민목(柳敏睦, 1910~1985)선생으로부터 서예를 배우게 되었다. 종질은 재야작가로 활동했지만 여초 김응현 선생이 인정할 정도로 지역에서 필명을 얻은 작가로 밀양의 '영남루'등에 많은 필적을 남겼다. 선생은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를 밀양지역에서 다녔기 때문에 밀양예총에서 주관하는 서예휘호대회와 밀양문화제에 서예작품을 출품하여 해마다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런 연유로 학창시절 서예에 큰 흥미를 가지게 되었고 성장해서 서예를 계속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 당시 한문서예와 함께 한글서예를 하게 되면서 오늘날까지 누구보다 한글서예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게 되었다. 이처럼 가학으로 서예를 접한 유년시절의 추억은 성인이 되면서 필묵을 가까이하게 된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선생은 고등학교를 마치고 1965년 약관의 나이에 대구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마침 누나의 시아버님이 서예가인 우송 김세헌 선생이었다. 우송선생이 친구인 소헌(素軒) 김만호(金萬湖, 1908~1992) 선생의 문하에 입문하도록 소개한 덕분에 소헌선생의 지도를 받게 되었다. 1966년부터 69년까지 소헌 선생의 봉강서실에 다니면서 서예를 익히기 시작했다. 1969년 소헌선생의 문하생들이 출품한 봉강연서회 회원전에 도 참여하면서 먹향을 더욱 가까이 하게 된다. 해서와 행서에 능했던 소헌선생은 마음이 바르게 되어야 글씨도 바르게 된다는 심정필정(心正筆正)을 강조했다.


그러나 70~80년대 10년 동안 사업체를 성서지역으로 옮기면서 사업으로 바빠 공부에 진력을 다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책상 앞에 늘 붓을 걸어두고 아쉬움을 달래곤 했다. 마음은 서실에 있었지만 시간이 여의치 않아 서실출입을 못한 10년 동안 붓을 가까이 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뒤 1981년 사무실을 대구시내 아카데미 극장 앞으로 이전하면서 송재(松齋) 도리석(都利碩, 1919~2002) 선생의 서실에 잠시 미루어 놓았던 서예공부의 끈을 다시 당기기 시작했다. 3년 가까이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서실에서 부지런히 먹을 갈았다.
1984년 한국 천주교 200주년을 기념해 방한했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집전한 미사에서 한국인 103위가 성인품에 올랐다. 그 당시 선생은 대구 남구의 대명천주교회 평신도협의회 회장으로서 성당발전을 위해 뭔가 보탬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성당에서 첫 서예작품전을 갖게 되었다. 그 때 작품판매금액 전액을 성전건립기금으로 헌납하였다. 이전시에서 한글과 한문서예작품 30여 점을 발표했다. 주로 한글서예작품이 많았고, 성경구절을 가려서 정성껏 휘호했다. 주변에서는 박수갈채를 보냈지만 선생은 자신의 작품에 만족할 수 없어 마음 한구석이 허전했다. 왜냐하면 본인의 작품에서 아직 결구가 어색하고 필세가 약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선생은 고심 끝에 20년 가까이 경영해 오던 섬유공장을 그만두고 한글서예를 제대로 연구해 보려는 결심을 하게 된다.

2. 한글서예의 기둥을 세운 학서기


첫 전시를 마친 뒤 부족함을 채우려고 주변에 자문을 구하던 차에 지인이 대구지역에서 한글서예로 유명한 화촌(華邨) 문영렬(文榮
烈,1940~2007) 선생을 소개해주었다. 1986년 8월. 40대의 백천 선생은 마음을 굳게 다지고 이때부터 90년대 중반까지 10여 년 동안 화촌 선생의 일고서실에 출입하면서 체계적으로 한글서예공부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성경을 한글로 단아하게 휘호하고 좋아하는 글귀를 자유롭게 휘호하기 위해 서실을 찾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한글서예전문가가 되어야겠다는 꿈을 가꾸어 나가게 된다. 이전에 한문서예를 공부한 덕분에 다른 사람보다 진도가 빨랐고 한글고전을 하나씩 소화하면서 내재된 필재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5~6년 동안 밤낮없이 공부하면서 한글서예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일중 김충현 선생의 제자였던 화촌 선생을 통해 일중선생의 한글서풍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선생 스스로 "화촌 선생은 한글서예의 길을 열어준 스승"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일중과 화촌의
필의를 전수받은 것으로 살펴진다.


선생은 90년대를 넘어서면서 공모전에도 본격적으로 출품한다. 대구 광역시미술대전 우수상(1992년)과 매일서예대전 우수상(1993년)을 수상함으로써 이미 대구지역에서는 한글서예전문작가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고, 뒤이어 한국서예협회 초대작가(1994년)로 등단하면서 전국적으로 한글서예전문작가로 알려졌다. 이 시기 작품을 보면, 전통 궁체의 단아한 자태를 안정된 결구로 표현하고 있다. 즉 화촌 선생을 통해 서예술의 튼튼한 기둥을 세운 시기로 생각된다.


그러나 궁체일변도의 한글서예에 천착할수록 단조로움에서 변화를 모색해야겠다는 선생의 생각도 깊어진다. 각종 자료집과 이론서를 구해 탐독하면서 스스로 길을 찾아보려고 노력했다. 그렇지만 독학하는 공부에는 한계가 있었다. 마침 대구예술대(돈보스꼬예술대)에 서예과가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망설임 없이 입학을 하면서 새길열기에 도전한다.


3. 예술적 줄기를 만든 변화기

선생의 나이 50세. 1995년 대구예술대학교 서예과 1기로 입학을 하면서 서예인생의 또 다른 막이 열린다. 지난 10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한글서예를 연구해 왔지만 서예의 다양한 장르와 본질에 대한 탐구열을 식힐 수 없어 늦다고 생각하지 않고 전공자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학교에 입학한 뒤 4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출석하였고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한 결과 졸업식장에서 총장상을 받았다. 학구열에 불이 붙자 내친김에 경주대학교 문화재학과에 진학하여 서예사를 심도있게 연구했다. 석사과정을 마치면서 <광개토호태왕비문서체의 조형적 특징과 서예사적 위치> 라는 학위논문을 발표했다. 고구려의 대표적인 명비인 광개토대왕비를 상세히 고찰함으로써 서단의 주목을 받았다. 이 논문에서는 광개토대왕비의 문자를 유형별로 나누어 조형적 특징을 비교분석하여 그 독창적인 미학성을 밝혀냈고, 광개토대왕비가 한글고체의 뿌리라는 주장을 하였으며, 우리 민족의 정서 속에 이 비의 미적특징이 일관되게
흐른다는 점을 명징하게 추출해 내었다.


선생은 대학과 대학원에서 불과 몇 년 동안 공부하였지만 이론과 실기면에서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무엇보다 자신의 작품에서 독자적인 미의식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이시기는 글씨의 밖에서 글씨의 본질을 구한다는 서외구서(書外求書)라는 말의 의미를 찾은 시기라고 생각된다. 작가로서 자신의 작품관을 설정하고 창작의 기틀을 마련한 시기로 여겨진다.

주목되는 것은 선생이 대학입학 이전에 주로 사용하던 '운암(澐庵)'이란 아호가 1998년 이후 서실을 개원하면서 '백천(栢川)'이란 아호로 바꿔서 사용한 점이다. 이때부터 작품의 양식도 다양해지면서 궁체 이 외의 여러 서풍을 보여준다. 서예전공자들은 학교를 통해 변화를 수용하는데 적극적이면서 실험적인 작품도 빈번하게 발표하는 편이다. 선생 또한 이전보다 파격적인 작품을 보여준다. 따라서 대학과 대학원 시절은 선생의 예술세계가 농익는 귀중한 시간으로 보아야 하고, 작품에 있어서도 예술적으로 든든한 가지가 만들어진 과정이라고 보아도 좋을듯하다.


4. 독자적인 조형시각이 발현된 개화기


1998년 여름에 그 동안 안으로 담금질해왔던 공부를 타인과 공유하면서 교학상장(敎學相長)하려고 백천서예원을 개원하였다. 특히 선생의 나이 60대로 접어들었던 2005년부터 지금까지 그 동안 쌓아왔던 내공이 발아되어 자신의 조형시각으로 예술의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그것은 몇 번의 개인전에서 선명하게 파악된다.


2005년 열린 두 번째 개인전에서 각고의 노력으로 공부한 흔적이 그대로 드러난다. 선생은 20여 년 동안 한글서예를 전문적으로 연구해왔고 대학과 대학원에서 다양한 예술장르에 대해 이해의 폭을 넓혀왔다. 이 전시에서 판본체류는 파격적인 변화를 보여주었고, 궁체류도 다양한 창작양식을 선보였다. 작은 글씨로 금강경 전문을 휘호한 공력을 들인 작품은 크게 주목을 받았다.

2008년 세 번째 개인전에서는 재료와 작품양식에서 이전과는 다른 현대적인 양식으로 변화를 보인다. 도판에 문자를 올리고, 한글의 간결하고 단순한 조형적 특질을 발휘할 수 있도록 복합구성을 하거나 두 가지 서체를 곁들이기도 하며, 채색을 가미하는 등 한글서예의 새로운 변주를 보여준다. 시대정신과 추상적인 한글양식을 조화시키려고 하거나 한글작품 속에 자신만의 조형언어를 대입하려는 선생의 노력을 읽어낼수 있다.


2010년 한국미술관에서 열린 개인전과 2011년 봉산문화회관에서 열린 개인전에서도 이런 노력은 계속된다. 선생의 작품에서는 모노톤의 서예작품에 칼라를 도입한 것이 자연스러워 보이고 자음과 모음에 변화를 주거나 추상적이고 복합적인 작품으로 자신의 조형언어를 분명히 드러낸다. 무엇보다 판본고체의 멋을 새롭게 살려냄으로써 서예계에서 백천식 고체로 회자되고 있을 정도로 명성을 얻고 있다. 이런 판본고체의 개성화작업은 2013년 대한민국 제헌국회기념조형물 헌법전문 서예공모전에서 우수상을 수상하면서 객관적인 평가를 받았다. 이처럼 60대 이후 최근까지 선생의 작품을 보면, 자신의 색채를 뚜렷하게 드러냄으로써 개성미가 꽃으로 피어오르는 단계에 이르렀다고 볼수 있다. 이제 선생의 작품세계는 타자와 구별되는 분명한 특징을 가지게 된 것으로 읽혀진다.

5. 현대적인 구성으로 다양성을 살린 작품세계

번 6회 작품전에서는 지금까지 모색하고 연찬해 온 다양한 작품으로 구성되었다. 한글서예작품을 위주로 하면서 한문서예작품 몇 점도 선보이고, 글씨에 그림을 곁들인 작품이 있는가 하면, 색채를 넣어 화면의 분위기를 바꾼 작품 등 실로 다양하다. 작품의 크기도 소품 70여 점에 대형 병풍이 4점이다.


대형 작품 가운데 한문해서로 금강경 5200여 자를 휘호한 10폭 병풍과 개성체의 한글금강경 11000여자, 그리고 성서 산상일기는 5000여자에 이르는 한글판본고체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이 작품의 소제목은 94방의 인장을 직접 새겨서 찍었다. 이 인장을 새기는데 일 년 이상의 시간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부모은중경은 궁체와 판본의 복합서체로 8폭 병풍으로 선보인다. 이런 대작들은 즉흥적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치밀한 계획과 오랜 시간 동안 공력을 들여야 하는 작품들이기에 작가의 혼을 느끼게 된다.

헌법전문을 한글판본과 광개토대왕의 필의를 원용하여 휘호한 대형작품은 가로가 7m 10cm에 세로가 2m 30cm에 이른다. 이 작품은 국회의사당 공모에서 우수작으로 선정되어 호평을 받은 바 있는데 선생의 독자적인 개성미가 묻어나는 역작이다. 소품을 세분하면, 한글과 한자를 혼서한 작품, 한문작품, 글자의 크기를 다르게 하여 서제를 크게 휘호한 뒤 소자로 설명한 작품, 서체를 다르게 하여 제작한 작품, 선면에 휘호한 작품 등으로 오랫동안 구상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품구성에서 두드러진 특징은 오른쪽이나 위에 소제목을 크게 몇 글자로 휘호하고 그 내용을 풀어서 다양한 서체로 꾸민 장법이다. 밑판을 그어놓고 가지런히 행간과 자간을 맞추어서 휘호하는 한글서예의 일반적인 작품과는 큰 차이가 나는 작품류이다. 그 가운데 붉은 색으로 쓴 '열정'을 푸른색으로 뒤집어서 휘호해 놓은 작품은 이채롭다.


또한 사모곡을 서로 다른 서체를 한 화면에 휘호한 작품과 소월시 두수를 서로 다른 서체로 한 화면에 올린 작품에서 작가의 색다른 조형의 식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이런 양식은 젊은이도 잘 구사하지 않기에 신선해 보인다. 게다가 한자와 한글을 섞어 혼서로 제작한 작품에서도 어색함을 느끼지 않게 된다. 소제목을 한문으로 크게 휘호하고 작은 글씨로 한글을 쓴작품, 한문과 한글을 섞어서 휘호한 작품 등에서 모두 농익은 한문서예의 자연스러운 필치를 느끼게 된다.


한문작품 가운데 '6인'은 사람 인(人)자 여섯 글자를 각각 다르게 휘호하여 눈길을 끈다. 그 아래에 한글로 "사람이 사람다워야 사람"이라고 강조한 점이 윗트가 있어 보인다. 종이는 고지를 비롯하여 장지, 한지, 화선지 등에 고색창연한 분위기가 들게 물감 등으로 적절한 처리를 하여 세월의 흔적을 느끼게 한다. 흰 화면에 검은색 글씨 일색인 일반적인 서예작품에서는 볼 수 없는 특색이 뚜렷이 드러난다.


문장도 현대인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친근하고 귀감이 될 글감을 골라서 휘호함으로써 어렵고 딱딱한 서예작품이란 선입견을 불식시키고 있다.
이와 같이 선생의 작품을 살펴보면, 재료면에서 바탕색을 처리한 점,문자의 구성에서 복합구성을 하여 이채로운 점, 장법과 결구에서 고전적인 규율에서 벗어나 파격적인 시도를 한 점, 색채를 도입하여 단조로움에서 탈피한 점, 대형작품에서 공력과 정성을 느끼게 한 점, 현대인이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을 글감으로 사용한 점 등 여러 가지 요소에서 타자와 구별되는 뚜렷한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6. 遊於藝의 세계에서 한글서예를 즐기는 작가

공자는 논어 옹야편에서 "알기만 하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좋아만 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고 말했다. 선인들은 예술이든 학문이든 알고[知] 좋아하며[好] 즐기는[樂] 단계를 거치면서 유어예(遊於藝)의 세계에서 노니는 것을 이상으로 여겨왔다. 오랜 세월 먹향과 함께 걸어온 선생은 이제 유어예의 초입에 들어선 것으로 보인다. 백천서실을 개원한 이래로 오전 9시에 출근하여 저녁 늦게 퇴근하는 것을 철칙으로 여기며 지켜왔다. 명절을 빼고는 항상 연구실에서 공부하는 모습을 견지하고 있다. 진정으로 서예를 즐기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돌이켜보면, 선생의 예술세계는 밀양에서 유년기에 가학으로 시작한 서예가 뿌리가 되었고, 화촌 선생을 만나 줄기를 만들었으며, 대학에서 가지를 뻗어 올렸고, 최근에 자신만의 꽃을 피워올리고 있는 것으로 살펴진다.
이번 전시에서는 현대인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다양한 시도를 통해 끝없이 변주해 나가려는 조형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이를 통해 선생의 성실한 모습과 변화를 구하는 작가상을 가늠할 수 있다. 선생은 가장으로서도 큰 성취를 이루었다. 남동생은 서울에서 한의원을 운영하고, 장남(류정엽)은 미국 뉴욕삼성전자 본부차장, 며느님은 디자이너로 직장생활을 하며, 사위(정영철)는 신경정신과(의학박사) 개업의로 각자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가족에게 항상 강조하는 말이 자신의 좌우명이기도 한 '성실'이다. 그리고 선생 스스로 일상에서 이를 실천하고 있다.


오십년 세월을 붓과 함께 하면서 한글서예계의 거장이 된 선생의 꿈은 한글서예의 미학적 특성을 살려 지구촌에 제대로 알리는 것이다. 무엇보다 현대인이 공감할 수 있는 작품제작을 위해 탐구의 끈을 굳세게 잡고 있어 앞으로 어떻게 선변(善變)해 나갈지 알 수 없기에 다음 전시에 거는 기대가 크다. 청년작가 보다 뜨거운 열정을 지닌 작가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백천서실의 불은 앞으로도 꺼지지 않을 것이다. 한글서예를 사랑하는 그 뜨거운 열정을 30년 뒤에도 곁에서 볼 수 있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램을 가지면서 필을 놓는다.


2015년 12월 1일


觀山齋東窓아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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