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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밖에 선 그대, 방복희의 문고리 잡기 / 더뷰스 / 2022.08.30
아트코리아 | 조회 295
열린 듯 닫힌 문으로
눈이 자주 가더라
왜 문은 사람을 사로잡는가


더뷰스 갤러리뷰 :

방복희 '문(門)' 전 (2022.6.29~7.4, 서울 인사아트프라자 4층)



신은 문을 만들고 인간은 창을 만들었어

우리는 대개 문 밖에 있는 사람이거나 문 안에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스스로가 문(門)인 사람도 있다. 문은 내부도 아니고 외부도 아니다. 

​친구는 30년 동안 문짝만 만들어왔지만, 아직 하느님이 되지는 못했다. 하지만 하느님이 문짝을 만드는 존재라는 것은 깨달은 모양이다. 그는 말했다. "신은 문을 만들었고 인간은 창(窓)을 만들었어." 이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궁 문을 설계한 존재, 천국문과 지옥문을 설계한 존재는, 사람은...아니지 않은가. 신이 문을 만든 까닭은 안과 밖을 구획짓고 안으로 들어오는 법과 밖으로 나가는 법을 기획하기 위해서였다. 스스로 들어온 사람은 없어 보이지만 가끔 인간은 스스로 문을 박차고 뛰어나가버리기도 한다




드나드는 문, 넘나드는 창

창(窓)은 인간이 밖을 보기 위해 만든 것이다. 그 밖은 우주이며 자연이며 세상이며 햇살이며 빗방울이며 눈발이며 하느님이다. 창으로 들어오는 사람은 하느님이 아니고 인간의 법과 금지를 넘나드는 슬픈 사람이며 창으로 나가는 사람 또한 어떤 금지와 금기를 넘어 도망가는 다급한 사람이다. 대학 시절 문이 없는 집에서 산 적이 있다. 나는 그 방을 한쪽에 달려있는 창을 통해 들어왔고 창을 통해 나갔다. 그 방은 내게 늘 금지된 방이었고 늘 감옥같은 기분이 들게 하는 방이었다.

문을 만드는 마음은 하느님의 마음과 비슷한 모양이다. 어떻게 잘 닫힐까를 고민하고 어떻게 잘 열릴까를 고민한다. 닫힐까를 고민할 때는 안에 있는 사람의 마음이 밖으로부터 방해받지 않고 평안해지도록 함이며 열릴까를 고민할 때는 안에 있는 사람이 통하고자 할 때 쉽게 응답하도록 함이며 밖에 있는 사람이 통하고자 할 때도 기꺼이 응답하고자 함이다. 문을 닫는 것은 분리하여 평안해지는 것이며 문을 여는 것은 소통하여 안정감을 찾는 일이다. 목숨은 목의 문을 열고 닫는 일이며 생사는 눈을 열고 닫는 일이다. 




목숨은 문이고 생사는 창이다

우리는 목의 문이 닫히는 것, 혹은 눈이 닫히는 것을 그토록 두려워하지만, 그것은 대개 분리의 평안을 향한 설계에 응답하는 일이다. 문이 벽이 되는 일, 어쩌면 원래 벽이었던 문이 잠시 문이었다가 다시 벽으로 돌아가는 일이다. 벽이 문이었을 때의 잠깐 동안의 한숨과 안도. 그게 지금 살아있는 모양새의 전경일지 모른다. 문 밖엔 내가 모르는 것들이 늘 서성거리는.

그녀의 성은 방(房)이다. '방'으로 태어난 사람이, 내내 '문(門)'을 그리고 있는 것도 기이하다. 문이 없이는 방이 될 수 없으니, 이미 문이 있었을 터인데, 굳이 이토록 문을 만들고 문고리를 만들고 열쇠를 만드는 까닭은 무엇인가. 

중국 고대 삼황(三皇)의 한 사람인 복희씨(伏羲氏)는 그물을 만든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물고기를 잡는 기술을 보급한 분인 셈이다. 이 땅의 동남쪽에 살고 계신 복희씨는 문을 만드는 화가로 알려져 있다. 굳이 옛 황제와 동렬로 두고 싶다면, 문고리를 잡는 기술을 보급한 분이라고 해도 좋다. 그의 그림을 보면, 매우 실감나게 표현된 문고리를 잡고 싶은 충동이 일기도 하기 때문이다. 




문고리를 잡는 기술을 보급한 복희씨

방이 무엇인지, 놀라운 방식으로 가르쳐준 사람은 장자였다. 우리는 집을 짓는 일이, 집의 바닥과 벽과 천장을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해왔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건 집이 아니라 집의 껍데기이다.  그 껍데기에 인간이 기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의 빈간에 기거하는 것이다. 

집을 짓는 일은 어쩌면, 신의 공간을 인간이 훔치는 것이기도 하다. 신은, 어떤 공간을 특별히 누구에게만 쓰라고 하지는 않았다. 그것을, 상하, 주위로 뒤덮어 자기의 공간으로 분양하는 것이다. 신이 인간의 그 행위를 괘씸히 생각하여 철거를 명령한다면, 네가 설치한 바닥과 천장과 벽들을 떼어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원래 신이 펼쳐놓은 자유로운 공간이 남는다. 가만히 돌이켜보면, 집을 소유한다는 일은 참으로 놀라운 횡포이며 우주적인 기만이기도 하다. 

장자는 이 방의 쓰임을, 무(無)의 효용으로 설명한다. 그릇은 그릇 주위의 도자기가 쓸모의 핵심이 아니라, 도자기가 가둔 공간이 쓰임을 만드는 것이다.  인간이 살아있는 것은, 눈코입귀가 멀쩡하고 신체 말단과 뇌와 장기가 있어서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 속에 빈 자리가 있고 끊임없이 생겨나는 빈 자리로 피와 공기와 음식물이 드나들기 때문이다. 신체 때문에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신체가 만들어놓은 공간 때문에 살아있는 것이다. 빈 것이 생명을 만든다. 방의 생명도 그렇다. 




몸의 문은 입과 눈과 항문

사방의 벽과 천장과 바닥만 둘러놓았다면, 그것은 집이 아니다. 집은 드나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들어놓은 것이 문이다. 신체에도 '문'의 구실을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입과 눈과 항문이다. 그것들은 인간의 의지와 근육을 이용하면 개폐가 가능하다. 안에서 열 수도 있고 닫을 수도 있다. 이 문을 통해 생명 유지의 대부분의 일을 한다.

코와 귀는 뚜껑이 없는 대신, 입구를 복잡하게 깊숙하게 만들어 여과장치 비슷한 공간을 만들어놓았다. 이를테면 집의 환풍구같은 곳이랄까. 밥 먹는 일과 배설하는 일은 개폐장치가 있는 신체부위가 담당한다. 숨 쉬는 일은 구멍만 있는 여과장치가 담당한다. 이게 무슨 뜻인지 곰곰히 생각해보라. 늘, 신과 인간이 함께 공조해야 하는 것과 인간이 잘 관리해야 하는 것의 차이다. 

사람이 집으로 비유되는 것은, 인간이 집을 지어서 살기 때문이 아니라, 신체가 온전히 하나의 집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작가 방복희는 처음에 벽 혹은 담을 그리는 화가였다. 그러다가 문으로 넘어왔다. 벽 혹은 담을 그릴 때는, 경계를 만드는 것에 대한 관심이었으나 문을 만들면서 그 관심은 경계와 소통에 대한 것으로 확장되었을 것이다. 




작가는 왜 문에 매달려 있을까

작가는 지금, 문 안에 있을까. 문 밖에 있을까.  그림을 보면서 한참 그 생각을 해보았다. 문 안에 있다면 누군가의 기척에 문을 열어줄까 망설이고 있는 사람이고, 문 밖에 있다면 문득 들어가고자 하나 문이 깊이 닫혀있어서 안에서 열어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다. 마음문은 자물쇠가 안에만 달려있다고 말한 사람은 헤겔이다. 문은 결국 소통의 문제다.

문득 나는 이 작가가 밖에서 안으로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어딘가에 참여하기를 바라는, 어딘가에 들어가 깊이 앉고 쉬기를 바라는 마음이 아닐까 하는 생각. 문은 늘 열 수 있을 때에는 편한 것이지만, 그것이 잠겨서 열 수 없을 때에는 한없이 갑갑한 것이기도 하다. 문 밖에 있는 사람은, 방문객일 수도 있지만 방 안에 있다가 내쳐지거나 소외된 사람일 수도 있다. 

한지로 된 문들은, 지금 실용으로 흔한 문이 아니라 기억 속에 들어앉은 문이다. 내겐 외갓집 큰 방의 문이 떠오른다. 한지로 된 문들은 뜻밖에 질기고 튼실하여 웬만한 비바람은 다 막아낸다. 다만 빛이나 소리는 문이 닫히나 열리나 늘 저홀로 소통하는 특징이 있다. 새소리나 바람소리가 들리는 것, 달빛이 문에 비치는 것, 방안의 불빛이 바깥으로 새나가는 것. 이것이 한지 문이 자아내는 감성이며 오래 잊을 수 없는 정취이기도 하다. 




작가는 왜 문에 매달려 있을까

작가는 지금, 문 안에 있을까. 문 밖에 있을까.  그림을 보면서 한참 그 생각을 해보았다. 문 안에 있다면 누군가의 기척에 문을 열어줄까 망설이고 있는 사람이고, 문 밖에 있다면 문득 들어가고자 하나 문이 깊이 닫혀있어서 안에서 열어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다. 마음문은 자물쇠가 안에만 달려있다고 말한 사람은 헤겔이다. 문은 결국 소통의 문제다.

문득 나는 이 작가가 밖에서 안으로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어딘가에 참여하기를 바라는, 어딘가에 들어가 깊이 앉고 쉬기를 바라는 마음이 아닐까 하는 생각. 문은 늘 열 수 있을 때에는 편한 것이지만, 그것이 잠겨서 열 수 없을 때에는 한없이 갑갑한 것이기도 하다. 문 밖에 있는 사람은, 방문객일 수도 있지만 방 안에 있다가 내쳐지거나 소외된 사람일 수도 있다. 

한지로 된 문들은, 지금 실용으로 흔한 문이 아니라 기억 속에 들어앉은 문이다. 내겐 외갓집 큰 방의 문이 떠오른다. 한지로 된 문들은 뜻밖에 질기고 튼실하여 웬만한 비바람은 다 막아낸다. 다만 빛이나 소리는 문이 닫히나 열리나 늘 저홀로 소통하는 특징이 있다. 새소리나 바람소리가 들리는 것, 달빛이 문에 비치는 것, 방안의 불빛이 바깥으로 새나가는 것. 이것이 한지 문이 자아내는 감성이며 오래 잊을 수 없는 정취이기도 하다. 




불이 켜진 방의 빛

방복희의 문들이 지닌 컬러는, 한지 문이 지닐 수 있는 단조로움을 깨고 생기를 불어넣는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불이 켜진 방의 삶을 연상케 하는 매력을 담기도 한다. 신혼방의 불빛, 혹은 늦은 밤 서방(書房)님의 불빛, 잔칫날의 환한 빛, 슬픈 빛, 기쁜 빛, 어스름달빛, 울고있는 여자의 방에서 나는 빛, 외로운 기다림이 있는 방의 빛. 오랜만에 만난 정인의 숨소리가 있는 방의 불빛, 단순해 보이는 컬러들을 오래 들여다 보면서, 수많은 시간이 덧칠된 기억을 거기에 입혀보는 것이다. 

문살의 형상과 그림자를 표현한 도형들은, 몬드리안의 콤포지션을 우리는 일상 속에서 누려왔음을 깨닫게 한다. 문살은, 아름다움을 위해서 만들어진 도형이 아니라, 종이 밖에 없는 문을 어떻게 지속가능하게 할 것인가를 연구하는 고심 끝에 찾아낸 균형과 안정감과 구조감의 산물이다. 미감은 별도의 감수성이 아니라, 저 균형과 안정감과 구조감에서 비롯되는 2차적인 감정일지도 모른다는 걸, 방복희를 통해 돌이켜보게 된다. 

열쇠와 자물쇠는 같은 말이다. 열쇠는 여는 마음에서 보는 그것이고 자물쇠는 잠그는 마음에서 보는 그것이다. 여는 마음은, 소통하고자 하는 긴급에 부응하는 것이고, 잠그는 마음은, 분리하고자 하는 긴급에 또한 부응하는 것이다. 

​문고리라는 입체, 그 마음의 달그락거림

작가는, 단조로운 문의 평면에서 오직 뚜렷이 입체적인 존재로 매달려 있는 문고리를 부각시킨다. 문고리를 뚫어지게 바라보게 한다. 닫힌 문을 열려는 마음과 닫힌 문을 더욱 꽁꽁 닫고 싶은 마음 사이에, 저 낡은 숟가락 하나를 채워놓았다. 안에서야 쉽게 열 수 있지만 밖에선 저 쇳덩이를 어찌 해야만 열 수 있다. 

문고리는 마음이며, 기억이며 강박이며 감정이다. 오래전부터 알고 지냈고, 그래서 친분이 깊다고 여겼던 사람과 문득 급하게 헤어지고 난 뒤, 따라오지도 않을 사람을 마치 세차게 따돌리려는 듯 문고리를 여미고 또 여미는 사람. 한 사람을 단절하는 그 절망적인 기분은, 문고리 하나를 가만히 어루만져보는 것으로도 충분히 숨막힌다. 


가만히 오는 비가 낙수져서 소리하니
오마지 않은 이가 일도 없이 기다려져
열릴 듯 닫힌 문으로 눈이 자주 가더라​

                   최남선 '혼자 앉아서'

 

열린 듯 닫힌 문으로

이 시조의 백미는 마지막 구절이다. 열릴 듯 닫힌 문으로 눈이 자주 가더라. '열릴 듯 닫힌 문'이란 말에 숨을 헉,하고 멈출 만큼 짜릿했다. 사람 기다려본 사람은 저런 문을 몇 번은 쳐다 봤으리라. 문은 닫혀있는데 금방이라도 삐걱 하며 열릴 것 같다. 계속 바라봐도 매양 가만히 닫혀 있는데, 그래도 또 생각을 키우면, 문득 슬며시 열릴 것 같다. 그게 '열릴 듯 닫힌 문'이다. 마음과 시선이 자꾸 따로 놀며, 눈알만 멍멍해지는 문이다. 

빗소리란 게 꼭 발자국 소리같을 때가 있다. 귀가 듣고 싶은 소리가, 제 멋대로 돋아난다. 문 밖에서 그 소리가 들렸다 말았다 한다. '문으로 눈이 자주 가더라'는 그런 마음이 밀어낸 눈길이며 고개짓이다. 어? 혹시? 그런 물음표들이 슬그머니, 급박하게 생겨나면서, 몇 번이나 속은 고개짓에 다시 속는다. 

열릴 듯 닫힌 문으로 눈이 자주 가더라. 화담 서경덕의 '지는 잎 부는 바람에 행여 긘가 하노라'의 기분을 다 내면서도, 그 시품(詩品)을 만배는 업그레이드한 이 한 구절 만으로, 시인은 국어를 일류로 닦아낸다. 문은 저토록 은근하며 주체할 수 없는 '마음'의 에이전트이기도 하다.


[작가 노트]

문과 벽의 공간적 관계를 이탈리아 말로 하면 부오토와 피에네이짜. 공백과 충만으로 정의된다. 즉 벽은 충만하며 문은 뚫어져 있는 공백이다. 서로 상반된 공간적 의미의 단어이지만, 동양적 사고로 본다면 공백과 충만은 하나의 공간이다. 나에게 문의 개념은 동양적 여백 개념을 넘어 의경까지 포함되는 조형적 전환 의식 개념이다. 

막힌 벽은 뚫어야 문은 열리고 창문을 닫을 수 있다. 문은 내부에 있으면서도 외부를 볼 수 있고, 반대로 외부에서 내부를 볼 수 있으며, 담장, 울타리 즉 벽이 있어야 존재한다. 이렇게 문은 내외 공간의 대립적 요소를 상호 연결시키는 중재자의 역할을 한다.  내부공간과 외부공간 사이에 있는 문은 하나이지만, 열고 닫힘이 따라 두 가지의 세계를 동시에 느낄 수 있는, 혼성적인 힘이 있다. 대립된 세계 속에서 문을 통해서, 내가 존재하는 공간에서 또다른 공간을 느낀다.

문은 무의식을 일깨워주는 공간, 심리적인 창조공간으로 확대할 수도 있다. 심리적인 문은 내부와 외부의 대립적 영역을 이어주는 경계 역할도 하지만, 내면세계와 외면세계를 소통하는 상징적인 접합점이기도 하다. 문은 공간적으로 경계 의미이기도 하지만, 심리적 상징적 의미로는 소통과 단절의 상반된 의미도 가진다.

문은 닫혀있을 때보다는 열려 있을 때, 심리적 소통 공간감을 느낀다. 그리고 열린 문은 닫힌 마음을 열린 마음으로 변화시키고, 미처 보고 느끼지 못한 공간까지 상상하게 하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다. 또한 살짝 열린 틈새의 문은, 인간의 본성인 엿보기, 관음적 욕구까지 드러낸다. 문의 상징성을 통해 우리는 심리적으로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바라보고 상상한다. 

문의 은유는,  태초에 인간이 어머니 자궁문을 통해 세상에 태어나 수많은 마음의 문을 열고 닫고 만나고 다시 죽음의 문을 통해 하늘로 돌아가는, 돌고도는 윤회를 담기도 한다.  2022년 방복희.

출처 : 더뷰스(http://www.thevi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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